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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곤

거칠 것 없던 연산군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다. 그가 이장곤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또는 우만(寓灣)이며, 증좌찬성 이승언(李承彦)의 아들이자 춘양군(春陽君) 이내(李倈)의 외손이다. 이장곤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전했던 그는 1492년 유자광에 의해 유장(儒將)으로 천거된 바 있다. 이장곤은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는데 무예와 용맹이 출중했던 그가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한 연산군이 그를 서울로 잡아 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咸興)으로 달아났다. 함흥으로 도망간 이장곤은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하는 수척(水尺)의 집에 몸을 의지한다. 수척 중에 양(楊)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우가 이장곤의 비범함을 보고 형으로 하여금 사위 삼게 하였다. 그러나 이장곤이 천한 일을 할 줄 모르므로 장인은 항상 게으른 사위라 부르고 같은 마을 사람들도 모두 비웃었다. 다만 부인이 된 어부의 딸만이 온갖 궂은일을 다 돕고 함께 고생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이장곤이 다시 벼슬길에 올랐을 때 함께 살 수 있게 됨을 물론 임금으로부터 치하를 받게 되었다. 1508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된 이장곤은 사헌부장령·동부승지·이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병조판서 시절 심정(沈貞)과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데 가담하였으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죽여 없애려는 것임을 알고는 심정 등의 계획에 적극 반대하였다. 더욱이 죄인으로 몰린 사림들을 신문할 때 서로 자(字)와 명(名)을 부르며 신문하였다 하여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고 여주에 은거하였다. 이장곤의 호인 우만(寓灣)은 그가 살았던 여주읍 우만리와 연관이 있다. 여강으로 물러난 이장곤은 김안국, 신광한(申光漢) 등과 더불어 신륵사에서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정의 정사를 비난한다는 모함을 받고 경남 창녕(昌寧)의 옛 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금헌집(琴軒集)』이 있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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