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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이색

목은 이색처럼 여주를 사랑했던 사람도 드물다. 여주는 이색 자신의 유배지이자 부친 이곡(李穀)의 유배지였으며,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장원이 있던 곳이며,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으로 이색은 평소에 여주로의 ‘귀거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색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고려삼은(三隱) 중의 한 명이다. 가정 이곡의 외동아들로 영해 호지촌(豪池村)에서 태어났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성균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으며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귀국하였다. 1353년(공민왕 2) 고려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 숙옹부승이 되고 이듬해 3월 원(元) 제과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승사랑·한림원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1357년에는 다시 고려에서 우간의대부로서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 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벼슬을 했던 이색은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호응하여 부원파(附元派)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민족적 주견을 확립함으로써 왕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반대하던 이색은 역모로 몰려 귀양을 갔다. 조선 개국 후 유배에서 풀려나 부인과 함께 한산으로 내려갔던 이색은 두 아들을 잃은 시름에 오대산, 여주 등지로 방랑길에 오르게 된다. 이 무렵에 태조 이성계는 옛 친구의 예로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에 봉하고 토지 등을 내려주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색을 대하는 이성계의 태도에는 각별한 바가 있었는데 종종 왕궁으로 초빙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중문까지 나가 읍(揖)하며 배웅하였다 한다. 1396년(태조 5) 5월 이색이 다시 여강에 도착하였는데 임금이 보내온 술이라며 경기감사가 전해 준 술을 마시고 배 안에서 죽었다. 저서로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가 있고 능서면의 매산서원(梅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태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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