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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춘

조선 순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 자는 군정(君正)이고, 동지돈녕사 이용모(李龍模)의 아들이며 여주에서 태어났다. 1779년(정조 3) 유생강제(儒生講製)에서 제술(製述)로 수석을 차지하여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17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삼사와 이조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84년 응교로 있을 때 채제공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임금의 노여움을 사 평북 운산군(雲山郡)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해 8월 2일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식으로 인해 대사령(大赦令)이 반포되어 석방되었다. 이노춘은 원래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제술시험에서 1등을 하자 정조가 하교하기를 “그대의 대책(對策)은 글 뜻이 상세하고도 분명하니 반드시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논설에 대해 어둡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번 급제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 하였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과시(課試)에서 “이시수(李時秀)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이고 이노춘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그런데 택당의 연광정시(練光亭詩)를 집어 내 출제하였을 적에는 이노춘이 으뜸을 차지하였고 월사의 망해정시(望海亭詩)를 출제했을 적에는 이시수가 으뜸을 차지하였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재주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이노춘이 상소를 올렸는데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온당하게 여기는 입장에 서서 사도세자를 높이는 것으로 대표되는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시의를 좇는다고 배격하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가 정조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이노춘의 상소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분립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일로 이노춘은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3년만에야 풀려났다. 이후 이조참의를 거쳐 순조 즉위 후 강원도관찰사·대사성·대사간·예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1806년(순조 6)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시파에 의해 벽파가 축출될 때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벼슬길로 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 편저(編著)로 『홍문관지(弘文館志)』가 있다.

□ 참고문헌 : 『정조실록』, 『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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