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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1743년(숙종 19) 7월 1일 원경하가 이조참판이 되었고 9월 25일 9년 선배인 이기진이 이조판서에 제수되면서 동향 선후배가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완만함과 준엄함이 각기 달라 가부(可否)를 논함에 있어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침내 함께 벼슬을 버리게 되는데 원경하가 먼저 사직소를 올린 후 도성을 나갔고 이어 이기진도 곧 고향 여주로 돌아와 버렸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숙종이 이기진을 홍주목사로, 원경하를 청풍부사로 좌천시켰다. 이후에도 두 사람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이들의 다툼은 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대개 이기진은 일찍이 원경하와 한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조정에 벼슬하기에 이르러서는 취향이 서로 합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기진은 원경하가 시론(時論)에 부합하고 세리(勢利)를 따르는 것을 미워했는데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점점 소원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원경하 역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기진을 싫어해서 늘 조정에 상소하여 배척하였다. 우연히 조방(朝房 : 조신들이 조회의 때를 기다리며 모여 있던 대궐 밖의 집)에서 만나면 서로 욕설을 하기도 했었다.”

이기진의 본관은 덕수,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이고, 택당 이식의 증손자이며 양구현감 이당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헌납·교리·이조참의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부제학을 역임하고 강화유수가 되었으나 왕세자의 관례 때 봉전문(封箋文)을 지어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여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머물고 있던 중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급거 상경하여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함경도관찰사·대사간·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판의금부사·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744년 홍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경기도관찰사·판의금부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51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755년 6월 27일 이기진이 죽자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이기진은 집에 있으면서 행검(行檢)이 있었고 조정에 서서는 염간(廉簡)을 지켰으며 순실(純實)하고 곧은 말을 잘하여 아주 고가(故家)의 전형(典刑)이 있었다. 60세에 후모(後母)의 상(喪)에 복을 입으면서 예를 다하다 병이 나 죽으니 사람들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한편 퇴어 김진상과 섬촌 민우수, 그리고 동생인 낙촌 이규진과 더불어 여강을 노닐고 남긴 「여강기회록」이 전한다. 저서로 『목곡집(牧谷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경종실록』, 『영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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