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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

조선 인조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이고, 병조참판을 지낸 이육(李陸)의 현손이다. 김시양(金時讓)이 쓴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 보면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이괄은 무술뿐 아니라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이름이 알려졌다. 반정(反正)하는 날의 규약과 기획 등이 모두 이괄에 의해서 짜여졌다. 반정에 성공한 뒤 논공행상을 할 때 중간에 가담하였다 하여 2등공신으로 삼자 이괄이 크게 불평하였다. 이때의 공론(公論)은 ‘일찍이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켰을 때 유자광(柳子光)이 처음부터 모의에 가담한 것이 아니고 때에 임박하여 그의 계책을 세웠어도 1등공신으로 삼았는데 이괄에게는 억울한 일’이라는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반정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23년 포도대장을 지내고 평안병사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寧邊)에서 군사조련, 성책보수, 진의 경비강화 등의 임무를 충실히 하였다. 이때 느닷없이 이괄과 그의 아들이 모반을 꾀하였다는 무고가 날아들었다. 인조반정 직후인 이 무렵엔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이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여 반역 음모의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는데 이괄도 그 피해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외아들 이전(李旃)과 한명련(韓明璉)을 잡아들이기 위해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파견하자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자신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괄이 1624년(인조 2) 1월 22일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향하니 이것이 이괄의 난, 또는 갑자난(甲子亂)의 시작이다.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성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아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튿날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대와 무악재에서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삼전도 → 광주 → 경안을 거쳐 이천 묵방리(현 백사면 현방리) 민가에 몸을 숨기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인 기익헌(奇益獻)과 이수백(李守白) 등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때 이괄의 나이 38세였다. 여주군이 1982년에 발간한 『문화유적』에 따르면 이괄의 가족은 여러 대를 걸쳐서 여주에서 살았으며 옛 역전(驛前) 부지와 법원 아래 홍문리 일대가 이괄의 저택지였다고 전한다. 이괄의 집은 오래전에 없어져 버렸으나 경찰서 맞은 편 법원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얼마 전까지 우물이 남아 있었는데 도로 공사로 인해 사라졌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하담파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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