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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

조선 숙종대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희중(希仲)이며 호는 백호(白湖) 또는 하헌(夏軒)이다. 초명은 정(鍞)이었으나 25세 때 휴(鑴)로 고쳤다. 대사헌 윤효전의 아들이며 첨지중추부사 간서재(澗西齋) 김덕민(金德民)의 외손이다. 윤휴는 3세 때 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가 장례를 치루고 잠시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8세 때 다시 여주로 피난하였다. 정묘·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보은(報恩)의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총기가 있어서 한자를 가르치면 열자를 깨우쳤고 불과 2년 만에 경서를 외워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28세 때 다시 여주로 옮겨와 금사면 백호에 자리를 잡으니 그의 호(號)는 여기서 연유한다. 이로부터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1676년(숙종 2)에 비로소 윤휴는 정4품인 성균관사업의 직을 받고 출사하였다. 그러나 우찬성으로 있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허적(許積)의 서자(庶子)인 허견(許堅)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4월에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후 1689년(숙종 15)에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신원이 받아들여져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였던 까닭에 당시의 일류 명인들이 윤휴와 교분을 가졌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하면서 상찬해 마지않았다. 저서로 『백호전서(白湖全書)』가 전한다. 묘는 금사면에 있었으나 근래에 대전으로 이장하였다.

□ 참고문헌 :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백호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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