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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익

중종 때 34명의 청백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이 윤사익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자는 언례(彦禮)이며 증좌찬성 윤징(尹澂)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부모님 사후, 형들의 도움으로 산방에 들어가 10년 공부 끝에 1507년(중종 2) 생원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514년 별시에서 을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호조좌랑·춘추관기주관을 역임하고 잠시 평양교수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여주 대신면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520년 다시 벼슬길에 나와 예조좌랑·지평·헌납·직강이 되었다. 1528년 경성(鏡城)판관으로 있으면서 좋은 평판을 얻은 뒤로 의정부와 이조·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적합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1538년 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1539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임금의 관심을 전하였고, 다녀와서 한성부우윤·공조참판·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 무렵 윤사익은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지조가 깨끗하여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당(黨)을 이루어 대립하고 있던 윤임과 윤원형을 꾸짖고는 파직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어 다시 권신 이기(李芑)를 탄핵하였다는 이유로 삭직, 유배되어 있던 구수담(具壽聃)을 율(律)에 의해 다스리라고 청함으로써 사림(士林)의 지탄을 받게 된다. 1557년(명종 12) 숭정대부에 올랐다가 1563년에 졸했다. 비록 말년에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나 50년간 조정에 참여하면서 청백하며 검소하게 살았고 효도와 우애가 유달리 특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묘는 대신면 보통리에 있다.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 『명종실록』,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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