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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

실학(實學)의 비조(鼻祖)로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결국 백성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지성인이 있었다. 그가 유형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또는 둔옹(遁翁)이며, 아명(兒名)은 덕창(德彰)이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이자 예문관검열 유흠(柳欽)의 아들이고 의정부참찬 이지완(李志完)의 외손(外孫)이다. 유형원의 아버지는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루되어 유형원이 2세 때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형원은 키가 6척이나 되었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얼굴은 희고 눈에는 광채가 났으며 수염은 길어서 손아래까지 닿았고 태어날 때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형원은 문학·병법·천문·지리·음양·점술·음악·의약·산학·한어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 통달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성장 배경에는 5세 때부터 글을 가르친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이 있었다. 이원진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 사건 당시에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고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을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였다. 유형원이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가족들과 함께 원주(原州)로 피난 갔다가 지평을 거쳐 여주 백양동, 즉 지금의 능서면 백석리와 내양리 부근에 정착하니 이때가 22세였다. 유형원은 이후 10년간 여주에서 살게 되는데 23세에 할머니 상을 당하고 25세에 고모부 김세렴, 27세에 어머니 여주 이씨(驪州 李氏), 30세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탈상하면서 2차례에 걸쳐 성균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어전(御前) 시험에서 써낸 답안지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것이 낙방 이유였다. 실력에 비해 시험 운이 없었던 그가 뒤에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인해 진사시험에 응시하여 8등으로 합격하지만 벼슬길에서 뜻이 멀어진지 오래였다. 여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동화되어 순수해진 심성 위에 참된 지식을 쌓아 인격의 수양이 고매한 경지에 이른 그였기 때문이다. 32세 때부터 전라도 부안(扶安)에서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 상황과 그 이후 국민 생활이 도탄에 빠진 원인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체제에서 찾았다. 그는 양반 중심의 『경국대전』 체제를 벗어나 양반만이 아닌 모든 신분의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자기의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균전제(均田制)로의 토지개혁,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부병제 실시, 조세 및 녹봉제의 정비, 과거제 폐지와 공거제 실시, 신분제 및 직업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유형원의 사상은 그가 여주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이래 18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 실려져 이 땅에 실학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 『정조실록』,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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