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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

효종대왕이 재위 10년 동안 일구월심으로 주창한 북벌의 핵심인물들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원두표이다. 본관은 원주이고 호는 탄수(灘叟) 또는 탄옹(灘翁)이며,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裕男)의 아들이다. 원두표가 본격적으로 북벌계획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1653년(효종 4) 병조판서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원두표는 김자점(金自點)의 낙당(洛黨)과 대립되는 원당(原黨)의 영수였으므로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김자점이 죽고 난 뒤 정국을 이끌 적임자이기도 했다. 이때 효종대왕은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에 임명하는데 이는 문무를 조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써 원두표에게는 국방정책을, 이완에게는 그 실행을 맡긴 인사 조치였다.

1654년 원두표의 건의로 인조 때 없어졌던 영장(營將) 제도가 부활되었다. 각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진영(鎭營)의 장관을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 하는 바, 이들은 정3품 당상직으로 8도에 46인, 강화부에 5인등 51명으로 구성되었고 지방의 군비확장사업을 담당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655년 장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에서 효종은 13,000여 명의 조선 군사들이 펼치는 열무식(閱武式)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현종 3) 좌의정이 되었다. 효종대왕과 원두표의 밀접한 관계는 원두표의 신도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상께서 모든 유생들이 항상 답답하여 정사를 논할 사람이 없어 하시더니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중 오직 공만이 큰일을 책임질 만하다 하시고 마침내 군사의 일을 공에게 맡기고 도성의 보루마저 겸하여 관장토록 하시고는 때때로 혼자서 밀실에 불러 들여서 더러는 술을 권하시며 후원에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시며 사관에게 명하사 이를 기록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표범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패도를 하사하시니…” 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묘는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원두표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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