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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하

조선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 또는 비와(肥窩)이다. 효종의 부마인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의 손자이자 홍주목사를 지낸 원명구(元命龜)의 아들로 여주 대신면 상구리에서 태어났다. 1721년(경종 1)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영조가 효종대왕의 외손(外孫)이 급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원경하를 인견하였는데 원경하가 말하기를 “탕평의 정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마는 노론과 소론만을 호대(互對)하면 어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물론하고 재주에 따라서 쓴 뒤에야 공도(公道)를 넓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며 당시에 시행되고 있던 소탕평(小蕩平)을 반대하고 이른바 대탕평(大蕩平)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원경하는 소론의 온건파 조현명(趙顯命)과 함께 임금이 탕평책을 펴는데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1737년 호남별견어사(湖南別遣御史)가 된 원경하는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의 농기인 깃발과 풍물의 연장이 백성들의 반란시에 중요한 구실을 할 것으로 보고 이를 관아로 압수하였는데 농민들의 백년민속(百年民俗)을 금지시킨 것이라 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일은 풍물에 관한 최초의 탄압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창하집(蒼霞集)』이 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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