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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서

신분제도가 엄격히 살아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양첩의 자손은 서(庶), 천첩의 자손은 얼(孼)이라 구분하고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관품에 따라 관직에 서용될 수 있는 벼슬의 한계를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의해 양반의 첩 자손은 영원히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553년(명종 8)에 양첩의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자격을 주었고, 1625년(인조 3)부터는 천첩의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런 연유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서자들의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류를 개탄하며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일컬으며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는 일로 소일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관찰사 심전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상산군 박충간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박치인의 동생 박치의(朴致毅), 허홍인(許弘仁) 등 7명과 예조참판 김계휘의 서자 김평손(金平孫), 김경손, 유효선(柳孝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광해군 즉위 초인 1608년에 서자도 관리에 등용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소하였다. 아마도 선조의 서자인 광해군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기대했던 듯싶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자 세상을 포기하고 여주 강가에 은둔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서양갑, 박응서, 심우영, 허홍인, 유효선 등이 공동생활을 하며 어울려 살았던 곳이 지금의 능서면 양화천(楊花川)과 강이 만나는 주변이라고 한다. 처음엔 그저 세상일 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계획이었으나 글만 읽던 서생들이라 농사가 잘될 리 없었다. 차츰 이들은 나무꾼, 소금장수, 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 등을 가장하여 화적질을 하게 된다. 그러다 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하는데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라는 자가 이들의 뒤를 밟아 여주까지 추적한 끝에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 되었다. 이 일은 광해군 즉위에 공헌한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 또는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부르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이 체포될 무렵 광해군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던 이이첨(李爾瞻)은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 마저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터였다. 강변칠우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자 부제학으로 있던 이이첨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 등과 짜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진술하라”면서 박응서를 회유하였다.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박응서가 그들의 각본대로 허위 자백을 하니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들은 단순한 도적들이 아닙니다. 장차 큰일을 일으킬 생각으로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려 한 것입니다.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과 몰래 통하여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 마침내 강변칠우와 그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 뒤에 김제남이 사약을 받았고 1613년 8월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골방에서 질식사 당했으며,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는 결국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 반정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자 계축옥사 때 동료를 무고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던 박응서와 광해군의 신임을 기화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 등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택당별집(澤堂別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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