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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장

조선 숙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치구(稚久)이고, 좌의정 민정중의 외아들이며 송준길의 외손이자 송시열의 문인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가 되었고 곧 벼슬길에 나가 지방 현령을 지내던 중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할아버지 민광훈과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연이어 장원을 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삼세문장(三世文壯)’이라고 일컬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집안만이 삼세문장을 배출하였으니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민진장은 예조참판·도승지·병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1700년 1월 우의정이 되었으나 그해 3월에 죽었다. 박양한(朴亮漢)이 지은 『매옹한록(梅翁閑錄)』에서는 민진장을 ‘충효대절(忠孝大節)’로 표현하고 있다. “우상까지 지낸 민진장은 노봉(老峯) 민정중의 아들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는 부친을 모시고 적소(謫所, 귀양살이 하는 곳)까지 따라가 시중을 들고 음식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적소에서 부친의 상을 당하여 반장(返葬)할 때에 몸이 상할 정도로 슬피 우니 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은 차탄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평안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민효자’라 칭한다. 그 어머니는 평생토록 병을 앓아 때로는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밤낮없이 어머니의 곁에서 머리를 빗겨드리고 음식을 떠 넣어 드리는 일을 직접 하였고,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그는 또한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로서 국가기무를 전담하고 밤낮으로 몸을 다해 국사에 이바지하다가 제대로 수(壽)를 누리지 못하고 끝내는 그 어머니의 슬하에서 작고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충효대절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는 점동면 부구리에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매옹한록(梅翁閑錄)』,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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