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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원

노론(老論)의 도움을 얻어 임금 자리에 오른 영조에게 있어서 탕평책의 수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조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노론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한편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을 용서하고 등용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조의 탕평책을 강하게 거부한 여주 사람이 있었다. 그가 민진원이다.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성유(聖猷)이며 호는 단암(丹巖) 또는 세심(洗心)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오빠이며 좌찬성 송준길의 외손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는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이 탄압을 받던 때라 등용되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벼슬길이 트였고, 1697년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병조좌랑·지평·집의·전라도 관찰사·공조참의·강화부유수를 지냈고, 1712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이조판서·호조판서·공조판서·우의정·좌의정·중추부영사·봉조하가 되었다.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진원은, 소론의 대표로서 백사 이항복의 현손인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 등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도 나름대로 공명정대한 왕도정치를 위해 탕평책을 주장하였으나 임금과는 극명한 방법의 차이를 보였다. 이에 임금이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회유하였으나 이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함께 대궐에 입시하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로 멀어졌다. 1736년(영조 12) 3월 19일 임금이 이번에는 민진원과 이태좌를 화해시키기 위해 이들을 희정당(熙政堂)으로 불러 술자리를 벌였다.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閔亨洙)와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도 함께 불렀다. 그러나 이해 11월 28일 민진원이 죽음으로써 화해의 결말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민진원은 여주읍 단현리(丹峴里)에 90여 칸짜리 집을 짓고 남한강가에 침석정(沈石亭)이라는 누각을 세워 노후를 즐겼다. 침석정이 있었던 바위에는 “단암(丹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단암주의(丹巖奏議)』『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묘는 가남읍 안금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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