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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민정중

인조(仁祖)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부수찬 유계(兪棨)가 이미 인종(仁宗)의 호칭이 있으므로 인(仁)자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를 갔다.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난 유계가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 선비를 만났다. 마침 같은 방향이었으므로 말동무를 하며 동행하게 되었는데, 해질 무렵 다리를 건너던 선비가 냇물에 빠지고 말았다. 부실했던 다리가 무너져 내린 탓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선비는 젖은 옷을 말리고 갈 테니 유계에게 먼저 주막에 가 있으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선비가 오지 않자 걱정이 된 유계는 선비를 찾아 나섰고 얼마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고 있는 선비를 발견했다. “아니, 여보게 선비!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하니, 젊은 선비는 “예, 다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이 어두워 뒤따라오는 과객(過客)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 사려 깊은 젊은 선비가 민정중이다.

민정중은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아들이다. 1649년(효종 원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예조좌랑을 지냈다. 그가 부사과(副司果)로 있을 때 올린 상소문이 효종(孝宗)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는데 임금이 “그대의 소장을 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않았다. 그대는 나이 어린 학사로서 사무를 통달하고 세태를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해박한가! 사안에 따라 할 말을 다하고는 숨기는 것이 없으니 내 마음에 더욱 가상하게 여겨진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대도 또한 나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이 충직한 기개를 잘 길러나가 원대한 성취를 기약하도록 하라” 하고는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민정중은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성·함경도관찰사·대사헌·이조판서·호조판서·공조판서·한성부윤·의정부참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남인의 배척으로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저서로 『노봉집(老峯集)』, 『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전한다. 묘는 여주시 상거동에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 『효종실록』, 『숙종실록』, 『대동기문(大東奇聞)』,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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