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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응식

조선 고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성문(聖文)이며 사호(賜號)는 우당(藕堂)이다. 민유중의 8세손으로 생부는 판서 민영우(閔泳愚)였으나 민한준(閔漢俊)의 계자가 되었다. 1879년(고종 16) 서사(筮仕)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으며,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던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을 열었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고 1884년에는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가 되었고 1886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들과 함께 수구파를 형성하여 개화파 타도에 앞장섰다. 후일 척족세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원세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 들이기도 하였다. 1891년 예조판서가 되었고 당시 방곡령(防穀令)으로 인한 황두배상(黃豆賠償) 문제에 반대하며 일본을 규탄하였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 등의 암살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뒤에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을 때 물의를 일으켜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여흥민씨삼방파보』,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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