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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병약한 경종(景宗)이 34살이 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자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뒤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만든 다음 두 달 뒤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무산되었다. 이를 틈타 소론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노론의 핵심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 사대신(四大臣)이 유배, 처형되는 임인옥사(壬寅獄事)가 벌어졌다. 김창집의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고,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675년 아버지가 원주(原州)에 유배되자 이후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684년(숙종 10)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712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이 되었다. 왕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의 탄핵을 받아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성주(星州)에서 사사되었다. 1722년 4월 김창집이 사약을 받던 날 마침 민진원(閔鎭遠)이 그곳에 귀양와 있다가 김창집을 영결하게 되었다. 이날 김창집은 “내 평생 사업이 오직 정책(定策, 동궁 책봉을 정함)한 일인데 지하에 들어가 선왕을 뵈어도 부끄러움이 없을까? 동궁이 편안하다면 죽은들 또 무엇이 한이리요?” 하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웃고 말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고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있어 약관의 겸재(謙齋) 정선(鄭敾)을 관직에 추천하여 이 땅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로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 『몽와집(夢窩集)』 등이 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묘는 대신면 초현리(草峴里)에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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