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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상

조선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퇴어(退漁)이다. 문원공 김장생의 현손으로 참판 김익훈(金益勳)의 손자이고 증판서 김만채(金萬埰)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1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지평·수찬·필선·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 45) 3월 장희빈(張嬉嬪)의 묘를 옮길 때에 세자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지평으로 있던 김진상은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한 말을 예로 들어 세자의 망곡례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김창집, 판충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頤命), 우의정 이건명(李健命)등이 “개장(改葬)은 비록 초장(初葬)과는 다르더라도 무릇 예절은 한결 같이 초장의 의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망곡례가 거행되었다. 이 일은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불거져 나와 김진상은 “사친(私親)에 대한 정성을 가로막은 죄인”으로 몰려서 무산(茂山)으로 귀양을 갔다. 3년 뒤 영조가 임금이 되니 “김진상에게 80세 된 노모가 있으나 돌볼 형제가 없으니 불쌍하다”는 논의가 일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벼슬에 뜻을 잃은 김진상은 고향 여주에 살면서 8로(八路)를 두루 유람하며 시(詩), 술과 더불어 산수를 즐기다가 여주에서 죽었다. 임금이 그의 지조와 재주를 아껴 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대사헌·좌참찬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다만 상소로써 임금이 올바른 정사를 펴도록 부탁할 뿐이었다. 한편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 낙촌(樂村) 이규진(李奎鎭) 형제와 더불어 여강을 노닐고 남긴 「여강기회록(驪江耆會錄)」이 전한다. 글씨에 능하여 많은 비문을 썼다. 문집으로는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가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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