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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김이소

조선 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이고, 영의정 김창집의 증손이자 부사 김탄행(金坦行)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당시 충신의 후손들만을 위하여 시행된 충량정시(忠良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0년(영조 46) 홍문관교리를 거쳐 1776년에 대사간·강원도관찰사, 1778년(정조 2)에 도승지·대사성을 역임하고 예조·이조·형조·병조·호조판서를 지냈다. 178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다녀와서 우의정이 되었고 1793년 사옹원도제조로 있다가 좌의정이 되었으며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 다시 청에 다녀온 그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정조임금은 채제공과 더불어 김이소를 꽤나 신임했었다. 신임이 두터웠던 김이소가 비록 한시적이었지만 삭탈관직(削奪官職)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796년(정조 20) 1월 24일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뒤에 융릉으로 개칭)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천(蔓川,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신창동)의 성문이 닫혀 임금의 행렬이 길에 머물게 되니 유도대신(留都大臣, 임금이 서울을 떠나 있을 때 도성을 지키던 신하)으로 있던 영돈녕부사 김이소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이소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그의 졸기(卒記)에 잘 나타나 있다. “1798년 8월 24일 영돈녕부사 김이소가 죽었다. 질박 정직하고 확고부동하여 옳은 것을 보면 굳게 지키면서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재유(才猷)와 문학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없었어도 위에서 의지하며 늘 중하게 여겼다. 김이소의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자 하교하기를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보니 참말이 아닌 것처럼 의심되기만 한다. 놀랍고 가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말로 하랴. 확고부동하게 지키는 바가 있어 모습만 보아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따르고 의지한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연전에 한번 겪어보고는 바로 경탄하였는데 더구나 고가(古家) 교목(喬木)의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니 더욱 심회를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묘는 가남면 본두리(本斗里) 묘촌에 있었으나 근래에 청주로 이장하였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名宦)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 『정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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