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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행

1779년(정조 3) 8월 6일. 정조가 영릉(寧陵)에 배알하러 왔다가 여주에 살고 있던 김양행을 만났다. “내가 경을 보려는 마음이 목마를 때에 물마시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이에 앞서 돈소(敦召)한 것도 여러 번이었으나 성의가 천박하여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기쁘다.” 임금으로부터 이처럼 사랑을 받았던 신하가 김양행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정(子靜)이며 호는 지암(止菴) 또는 여호(驪湖)이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자 증참판 김신겸(金信謙)의 아들이며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외손(外孫)이다.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사간원정언·장령·집의·호조·예조·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정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김양행은 1758년(영조 34) 7월 홍계능(洪啓能), 송덕상(宋德相) 등과 함께 초선(招選)되어 벼슬길이 열렸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량(慈良)하며 학문에 대한 조예가 정밀하고 심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벼슬에 뜻이 없었던 김양행은 여주에 머물며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고 그러던 중 이날에 이르러 정조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때가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임금의 간청에 못 이겨 병든 몸을 일으켰던 김양행은 임금과 마주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실록에 남아 있는 그의 졸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1779년 11월 23일 형조참판 김양행이 졸하였다. 젊어서부터 경학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하였으며 고(故)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에게 수업하였다. 영조 무인년에 학문에 독실하고 실천을 힘쓰는 것으로 천거되어 대직(臺職)에 제수하였으나 응소하지 않았다.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엄한 견책을 받았을 때에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영조가 노하여 면직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금상이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기해년에 임금이 영릉에 전알하였을 때에 김양행이 여주에 살았으므로 명을 받고 행전에 들어와 뵙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따라서 조정에 나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이 권세를 부리고 날뛰었으므로 금문에 들어가는 자는 다 문안하였으나 김양행만은 돌아보지 않았는데 임금이 늘 말하기를 ‘풍의(風儀)가 청고한 것이 볼만하니 근세의 유자(儒者)중에 으뜸이다’ 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지암문집(止菴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은일(隱逸)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 『정조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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