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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김안국

김안국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어 여주 금사면 이포리에 우거하고 있었다. 허전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경치 좋은 이포 강가에 정자를 세우니 그것이 범사정(泛槎亭)이다. 지금은 훼손되어 전하지 않고 있으나 이 인연으로 김안국은 금사면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며 참봉 김연(金連)의 아들이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하였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507년(중종 2)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대제학·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나이 20세가 못 되어 부모를 연이어 여의었던 까닭에 호를 모재(慕齋)로 자호하고 정성을 다하여 죽은 부모를 섬겼다. 출입할 때는 반드시 고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祭)를 올렸다. 조금이라도 의례(儀禮)에 어긋나면 온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정성스럽게 친족을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젊어서부터 벼슬에 올라서는 밤낮으로 수고로움을 잊고 국사에 힘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안국의 성품을 짐작케 하는 일화들이 있다.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하고 혹은 오이를 따가지고 와서 바쳤는데 김안국은 그것을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였다. 동생 김정국이 이를 보고 핀잔을 두자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오는데 내가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하였다. 김정국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잡곡밥도 이어 가지 못하였으나 김안국은 전원을 장만하여 양곡을 쌓아두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또 거두어들이며 고을의 모임에는 꼭 참석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김안국이 전라감사가 되었을 적에 마침 전주에 있는 경기전(慶基殿,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을 중창하는 날을 당하여 경기전 대문 밖의 조금 가까운 곳에 별도로 별당 두세 칸을 건축하였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정승 원두표(元斗杓)가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방백(方伯)이 되어 경기전을 방문, 태조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이때 경기전 참봉이 기생을 불러 이 별당에서 같이 자고 있었고 원두표는 그 별당을 철거해 버렸다. 그 후 나이 젊은 경기전 참봉들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생을 묵게 할 곳이 없어서 무엄하게도 재실(齋室)에 몰래 끌어들여 같이 자기도 하였다. 이런 일로 김안국의 일 처리에 대해 수긍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모재집(慕齋集)』,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모재집』,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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