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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모

고려 명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이며 민의(閔懿)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이 되었다. 명종에게 중용되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제수 받았으나 판병부사(判兵部事)가 재직시에 부당하게 병부(兵部)의 전주권(銓注權)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어사대(御史臺)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고 곧이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전직(轉職)하였다. 1183년(명종 13)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다가 1194년(명종 24) 80세의 나이로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景公)이다. 과거를 볼 때에 그가 지은 부(賦)가 율(律)을 잃어 버렸음을 보고 동지공거(同知貢擧)였던 이지저(李之氐, 1092~1145)가 취하려 하지 않았으나 지공거(知貢擧)인 최유(崔濡, 1072~1140)가 “비록 이 글이 부족하기는 하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으니 방미(榜尾)에 붙일 만하다.”고 하여 급제시켰다. 뒤에 최유가 그를 보고 “너의 부가 율에 맞지는 않았으나 그 사(辭)에 원대(遠大)한 기상이 있었으니 마땅히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인연으로 후일 민영모가 전주(銓注)를 관장하게 되어서는 최유의 손자인 최지원(崔祗元)과 최지례(崔祗禮)를 탁용(擢用)하였다. 1871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여주읍지』(1871), 『여흥민씨삼방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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