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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고려말의 천령현(川寧縣, 지금의 금사면 일대)은 여주와 양평을 관할하는 중심지였다. 경치 또한 아름다워 자연스레 인물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중의 한사람이 척약재(惕若齋) 김구용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 또는 육우당(六友堂)이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현손이고,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며,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외손자(外孫子)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년 뒤에 과거에 합격하여 덕녕부 주부가 되었으며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된 후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과 함께 후학을 가르치며 성리학을 일으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후진들을 힘써 추천하고 교육하는 데 싫증을 느끼지 않았기에 비록 쉬는 날이라 하더라도 지식을 배우러 오는 여러 학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용이 활동하던 시기는 원(元)·명(明) 교체기였는데 이때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1375년(우왕 1) 김구용이 삼사좌윤이 되었을 때 당시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이들을 맞으려는 이인임 등 권신들에 맞서 친명파인 이숭인, 정도전 등과 함께 반대하다 죽주로 귀양을 갔다. 얼마 후에 여흥으로 옮겨졌는데 산수경치가 좋은 곳에서 시와 술로 낙을 삼으며 자기 거처에 편액을 달아 육우당(六友堂)이라 하였다. 육우당은 천령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육우(六友)란 설월풍화(雪月風花)에 강산(江山)을 더한 것이라 한다. 천령은 김구용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비록 귀양살이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김구용을 부러워하며 이색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경지(김구용의 자)씨는 어머니를 모시는 틈틈이 강에서 배 타고 짚신 신고 산에 올라 낙화를 세고 청풍에 눈을 밟고 중을 찾고 달을 마주하고 손님을 청하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극치에 달했다.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김구용은 1381년(우왕 7)에 좌사의대부가 되자 8왕비 3옹주를 거느리고 있던 우왕의 절제 없는 행동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는 기개 있는 선비였는데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얼마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로 명(明)에 가면서 국서와 백금 100냥, 세모시와 삼베 각 50필을 가지고 가다가 요동에서 명의 도성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다. 이는 다분히 명과 원(元)의 알력으로 인한 결과였다. 김구용은 명 태조의 명령으로 대리위(大理衛, 지금의 운남)로 귀양 가던 중 노주(濾州)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집으로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있다. 1899년(광무 3)에 편찬한 『여주읍지(驪州邑誌)』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척약재집』,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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