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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황려(黃驪) 민씨라고도 부르며, 고려 공민왕대 이후 관료를 많이 배출하여 거성(巨姓)의 대열에 올라섰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여흥 민씨 중에서도 소위 삼방파(三房派)로 알려진 세 집안이 당시 집권당인 노론계열의 핵심으로 자리하면서 그 위상을 떨쳤다. 여흥 민씨 삼방파란 20세(世) 민광훈(閔光勳, 1595~1659)의 3남 시중(蓍重), 정중(鼎重), 유중(維重) 삼형제의 자손들이다. 민광훈은 연안(延安) 이씨(李氏) 이광정(李光庭)의 사위이며 묘는 양주군 미금면 명우리(鳴牛里), 즉 현 남양주시 일패동에 있다. 고종 때 군부대신, 궁내부대신 등 요직을 지내고 대한천일은행 등 근대회사의 경영에 참여한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은 문충공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의 후손으로 좌찬성 민영위(1818~1886)의 손자인데 묘가 대신면 옥촌리 벌말 북쪽에 있다. 단운(丹雲) 민병승(閔丙承, 1866~?)은 단암의 종손으로 이포리 금사면사무소 자리에서 살았다. 벼슬은 참판에 올랐으며 일제(日帝)의 작위를 받지 않았다. 이들의 묘소는 여주시 능현동, 대신면 옥천리 등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고, 세거지도 여주 곳곳에 분포되어 있으나 특히 북내면 신접리와 오학동에 많이 산다.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에 의하면 여주 관내에 여흥 민씨는 212호가 산다고 하였다.

『여흥민씨족보』(전39권 39책, 민영채 간편, 여흥민씨대동보소, 1923)에 따르면 이들의 선대(先代)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1世稱道
4世令謨
5世2男公珪 / 1男 湜
6世3男仁鈞
7世1男
8世2男宗儒
9世1男
10世2男
11世4男智生
12世1男審言
13世2男沖源(墓 대전 炭洞) / 1男 澄源
14世粹(墓 회덕 삼정동)
15世龜孫(1464~1522, 墓 회덕 삼정동)
16世齊仁(1493~1549, 號 立巖, 墓 양주 미금면 鳴牛里→현 남양주시 일패동)
17世思容(墓 양주 미금면 鳴牛)
18世汝健(墓 양주 미금면 鳴牛)
19世機(1568~1641, 慶州府尹, 墓 堤川 遠西面 院北十里 遇慶里)
20世光勳(1595~1659, 配 연안 李光庭 女, 墓 양주 미금면 鳴牛)
21世蓍重 鼎重 維重
22世鎭夏 鎭周 鎭魯 鎭長 鎭厚 鎭遠 鎭永

조선초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충청도 대전, 또는 회덕에 살던 이들이 양주에 정착한 시기는 족보를 근거로 추정해 보건대 20세 광훈의 고조인 16세 제인(齊仁, 1493~1549) 때임을 알 수 있다. 민제인의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이다. 152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입격하여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다가 이듬해 승정원주서로 기용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547년에 좌찬성에 올랐으나 간당들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공주로 귀양갔다. 적소에서 을사사화에 참여해 많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고 지내다가 죽었다. 민광훈은 1628년 알성문과에 장원을 한 뒤 정언과 지평 등으로 관직을 시작한 후 1652년에 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그곳에 피신 중이던 원손(元孫)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참의가 되었다.

민광훈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들이 각기 여주에 묘를 두어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중 첫째인 21세 시중(蓍重, 1625~1677)은 읍치에서 서남쪽으로 20리가 되는 수계면(首界面), 즉 현 능서면 오계리 숭계동 마을 북쪽 구릉에 묻혔다. 그 후손들은 이천, 양주, 음죽 및 충청도 제천 등으로 퍼지지만, 여주 내에서도 주내면(현재 여흥동·중앙동 지역), 흥천면, 점량면(현 점동면), 소개면(현 가남읍) 등으로 거주 영역을 확대한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21世蓍重(墓 여주 首界面 本洞→현 능서면 오계리)
22世鎭夏(墓 堤川 遇慶里)鎭周(墓 月松里)鎭魯(墓 首界)
23世承洙(墓 여주 首界面 梅柳洞)應洙(墓 흥천면)興洙(墓 鳴牛)
24世百亨(1707~1749, 墓 鉢山面 本里)百行(墓 月松里)百宗(墓 首界)
25世台爀(1746~1806, 墓 陰竹 東面 皓峴)濟烈(墓 이천)翼烈(墓 陵西)
26世致昇(墓 都憲公墓左麓)致恒(墓 陰竹 東面 皓峴)
27世碩鏞(墓 監司公墓左)順鏞(墓 여주 占粱 岡金山)
28世泳肅(1832~1875)泳秀(墓 여주 召開 /占粱)
29世厚植(墓 首界面) 系逈植(墓 제천 牛耕里)

둘째인 21세 정중의 묘는 주내면 대거리(大居里, 현 여주시 하거동)에 위치한다.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1649년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아갔다. 벼슬의 마지막은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고 1685년부터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가,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곳 하거리와 점량면(占梁面, 현 점동면) 구부곡(求富谷) 등에 주로 분포하였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21世鼎重(墓 州內面 大居里→현 여주시 하거동)
22世鎭長(墓 점량면 求富谷→현 점동면 부구리)
23世在洙(墓 부구리) 啓洙(墓 부구리) 安洙(墓 大居里) 學洙(墓 大居)德洙(墓 大居)
24世百男(墓 大居里) 百朋(墓 楊州 金村)百徵(墓 大居里) 百能(墓 大居)百憲(墓 牛橋)
25世克烈(墓 하거리)景爀(墓 하거리) 承爀(墓 大居)昌爀(흥천 白羊)
26世致謙(墓 大居里)致堯(墓 大居里) 系 致貞致周(이천 大月)
27世俊鏞(墓 求富谷)章鎬(墓 부론면) 周鎬象鎬(음죽 雪城)
28世系 泳瓚(墓 충주 목계)泳學(墓 하거리) 泳默(점동 淸安)泳道(점동 虎鼎)
29世昌植(墓 北面 外龍洞)廷植(墓 이천 雪星)

셋째인 21세 유중의 묘는 족보에 근동면 섬락리(蟾樂里)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여주시 능현동 명성황후생가 뒤쪽 구릉이다. 후배(后配)의 묘는 용인 수원동(壽院洞)에 있다.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은 1649년에 진사가 되고, 1651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1662년에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교리, 사간원헌납·경상우도염찰사·이조정랑·성균관직강 등을 지냈으며 1663년 여러 직을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1681년 3월에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민유중의 첫째아들 진후(鎭厚, 1659~1720)의 호는 지재(趾齋)로 어머니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입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으나 곧이어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다시 기용되어 파란의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1719년 의정부우참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그 뒤 개성부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민진후의 후손들은 근동면과 점량면, 즉 현 점동면 섬락리, 신진리, 신대리, 단수리를 비롯하여 강천면 이호리와 가야리, 가남면 안금리, 주내면 황학리 등지에 묘를 썼다.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의 묘는 원래 가남면 안금리에 있었는데 이후 광주(廣州) 쌍령리(雙嶺里) 등으로 옮겼다가 1893년에 보령군 주포면(周浦面) 관산리(館山里)로 이장하였다. 2003년에는 다시 원래의 자리인 안금리로 되돌아왔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21世維重(墓 여주시 능현동/后配墓 용인 壽院洞)
22世鎭厚(墓 근동 金橋里→현 가남면 안금리)
23世翼洙(墓 광주 초월면→가남읍 안금리) 遇洙(文簡公, 墓 여주시 능현동)
24世百奮(墓 용인 壽院洞) 百兼(1719~1747, 墓 강천면 이호리)
25世耆顯(墓 가남면 안금리) 佐顯(주내 황학) 彛顯(康川 가야) 鍾顯(墓 여주시 신진동)
26世致祿(初葬 廣州 雙嶺里, 2003년 이장 가남읍 안금리)致福(占粱 丹樹里)
27世系 升鎬(墓 근동 新垈) 女(明成皇后) 泰鏞(공주 마곡)
28世系 泳翊(墓 安金里) 泳穆(근동 新津里)

이에 비해 유중의 차남 이하 5남까지인 진원(鎭遠), 진영(鎭永), 진창(鎭昌), 진오(鎭五)의 후손들은 여주 아래인 죽산, 음죽 및 충청도 충주 등으로 퍼졌다.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의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이고,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91년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가 1694년 갑술환국 때부터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관직에 기용되었다. 이조판서·호조판서에 이어 1721년에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을 겸해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왕세제(王世弟 : 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해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는 원래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으나 1976년경 가남면 안금리로 이장하였다.

여주시 단현동 부라우나루는 마을에서 약 25m의 나지막한 고개 넘어 급경사를 이룬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강가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물결을 막아주지만 홍수가 나면 나루터 주변 가옥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고갯마루에는 민참판댁 와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인근의 능현리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자리한 여흥 민씨 집성촌이었다. 민참판댁에서 바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강가 바위 위에는 육모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주춧돌이 있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정자 주변 암벽에는 민진원의 호인 “丹巖”, “丹嵓”이라는 석각(石刻)이 남아 있다. 또 여주시 상동에는 영월루 아래 절벽에 “馬巖”이라고 각자된 바위가 있는데, 여흥 민씨의 시조탄생 설화가 있는 곳이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22世鎭遠(가남 안금)鎭永(壽院)鎭昌(근동 섬락) 鎭五(근동 섬락)
23世昌洙(竹山 遠三)樂洙尙洙(발산)
24世百順(竹山 遠三)百權(충주 山尺)
25世養顯(음죽읍내)章顯(壽院)
26世致和(강천 看梅)致甲(壽院)
27世元鏞(원주 綿乃面 寬川)
28世漢俊(음죽 남면 於隱洞)

그 밖에도 16세 제인(齊仁)의 5남 사환(思寰) 및 그의 2남 여량(汝良) 계열이 있는데 23세인 양수(養洙) 때 묘를 여주 산정동(山井洞)에 썼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14世
15世龜孫
16世齊仁(墓 양주 미금면 鳴牛里→현 남양주시 일패동)
17世5男思寰
18世2男汝良
19世梯(墓 양주 鳴牛里)
20世光謙
21世鳴世(墓 양주 鳴牛里)
22世奎祥(墓 金川 屈獨)
23世3男養洙(墓 여주 山井洞)
24世百殷(墓 覓谷)

이들과는 다른 계통으로 9세 적(頔)의 3남 변(忭) 계열로 개성에 거주하다가 13세 장절공(章節公) 건(騫, 1394年生) 때 와서 1남과 2남은 광주(廣州)로 가고 3남 신건(信達) 때 이곳 북면(北面) 천서동(川西洞, 현 북내면 천송리)으로 온 이후 후손들이 살아왔다. 세조 때의 문신인 민건은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장절(章節)의 시호를 받았으며 천송리 소지개고개 구릉에 묘가 있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9世 1男
10世3男忭(墓 개성 錢浦里) / 1男 思平 2男 愉
11世3男開 / 1男 霽 2男 亮
12世2男不貪
13世騫(1394生, 章節公, 墓 북내면 천송리)
14世3男信達(墓 북면 川西洞) / 1男 忠達 2男 禮達(墓 성남시 板橋)
15世
16世3男九老
17世
18世孝先
19世1男濯(墓 북면 川西洞) 2男 沃(墓 북면 川西洞) …此派居驪州
25世舜爀(墓 북면 川西洞) 一爀
26世致寬 致仁 系 致廷
27世鎬(1822生) 龍鎬 錫鎬 奎鎬基鎬(1855生) 在鎬(1860生)
28世泳云(1861生)泳祿(1882生)泳福(1881生)
29世泰植(1913生) 建植(1919生) 舜植(1906生)
15世2男
16世三老
17世忠烈(墓 松浦)
18世李鎔(墓 松浦 參判公下)
19世2男齊參 …此派居驪州

4세 영모(令謨)의 1남 식(湜)의 후손들도 17세 2남 계(쫩, 1541~1597) 이후로 이곳 남면 일신촌(日新村)에 터를 잡았다. 19세 성여(聖與, 1595~1666)의 묘는 강천면 웅덕산(熊德山) 아래 도성(道城)이란 곳에 있으며 이곳 외에도 충주 등지로 주거지가 확산되었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5世
6世3男命莘
7世
8世
9世祥正
10世3男
11世5男由誼(墓 개성 孝陵坊)
15世3男好問
13世解(墓 시흥 白岩里 隅西洞)
14世師騫(墓 시흥 白岩里 隅西洞)
15世3男㥳(墓 시흥 白岩里 隅西洞)
16世5男起文(1511~1574, 墓 시흥 白岩里 隅西洞)
17世5男洎(1541~1597, 墓 여주 남면 日新村)
18世有定(墓 여주 남면 日新村)
19世聖與(1595~1666, 墓 康川面 熊德山下 道城) …此派居驪州·忠州
50世廷亮(墓 지평 墨坊) 亨亮(墓 북내 完場洞)
51世周尙(墓 여주 日新) 周憲(墓 康川面 道城)周彦(墓 북면 九南) 周瑞(墓 북면)周臣
55世思一 思淵(墓 康川面 道城)思益(墓 남면 莫文)思謙思大
53世錫九 錫圭(墓 북내 完場洞)錫佐 錫範錫福
54世
55世樂洙 宜秀泰秀 晉秀 鼎秀斗秀 奎秀 衡秀英秀

한편으로 민희년(閔希年)이 조선 초에 점동면 도리로 입향하였고 효종 때 8세손 민석(閔碩)이 효종 때 4형제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내력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세잠(世)의 16세손 후손들이 우만리에서 수십여 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여흥민씨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계통의 파가 과거 어느 때인가 여주로 들어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驪興 閔氏 先代 系譜
成仁(墓 여주)成俊(墓 禮山) …此派居驪州
2男 興震(墓 牛晩里) 明震(墓 沔川)
暾(1664生 墓 백암)
6男 乃頤
漢鎭(墓 원주 신평)
惟澄(墓 加乙山) …此派居驪州
德升
永祐
宗赫(墓 加乙山)宗林(墓 玉隱洞)
聖中(墓 玉隱洞)聖任(配 청주 경씨 時泰 女)
夏揆 商揆
德寬-馬龍里
永義-金谷里 葛芝山 / 永和
珹-개군면 桂田里
聖謙-계전리 聖謨-계전리
系 大顯昌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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