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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마을의 성립과 전개

동족마을은 곧 ‘지연(地緣)에 기초한 문중조직(門中組織)의 형성’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지연은 입향 이후의 분가 방식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이의 반복과 그로 인해 증가한 동족원에 대한 조직화를 가능케 한 장치 또는 원리가 바로 종법(宗法)이다. 물론 이상과 같은 과정의 배경에는 농업생산력을 포함한 경제적 조건들이 그 변수가 되고 있다.

종법이란 본래 제후의 별자(別子)를 종(宗)으로 하여 일가를 세우게 하고 그 일가로부터 발생하는 소종(小宗)을 통합하기 위해 마련된 고대 주(周)의 제도다. 이러한 특정 신분의 가계계승 장치가 지배계층으로 일반화한 것은 중국(남송)이나 우리나라(조선)나 마찬가지로, 양국의 농업생산력발달 수준에 따라 2~3세기의 편차를 갖는다. 종법은 제사를 계승하는 입사(立嗣)의 원칙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수족(收族)의 기능도 한다. 종법은 인구재생산의 구체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동족마을이 형성되기까지는 인구재생산 방식인 종법의 시행이 선행되었으며, 입향조의 입향은 종법에 의한 점진적인 인구재생산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로 조선 초·중기에 입향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세습된 신분과 동족조직을 배경으로 각자의 지역에서 외래사족으로 분류된 세력들이다. 그러나 조선시기 이전에 이미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토성(土姓)들이나 임란 이후에 입향한 성씨들이 동족마을의 기반을 닦아나간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의 토성들의 향방은 사족으로의 전환을 통해 계속해서 그 세력을 유지한 경우와 외래사족에 밀려 향권을 상실한 채 임란을 전후하여 사라진 경우 등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는 지역 내에서의 분가(分家) 또는 분기(分岐)를 통해, 후자의 경우는 지역 밖으로의 이거(移居)를 통해 가계(家系)를 유지하고 동족마을의 기반을 마련해간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토성들의 추이를 지역적 범위를 넓혀서 보게 되면 결국은 외래사족의 입향 추이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 초기부터 주요 현상으로 나타난 향촌사회 지배세력들의 이와 같은 추세, 즉 다른 지역으로의 이거와 입향, 그리고 지역 내에서의 분가와 분기는 임란 이후에도 계속된다. 단지 시대가 내려올수록 이거와 입향보다는 분가와 분기의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경작지 확대 등을 포함한 이들의 지역 기반의 안정화와 관련된 듯하다.

이상과 같은 지배층들의 추이와는 달리 동족마을을 구성한 일반 상민들의 경우 입향조의 입향은 임란 이후로 나타난다. 이때의 ‘향’은 지역단위보다는 마을단위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전쟁은 무엇보다도 거주지의 이동과 더불어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이탈 기회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임란전쟁이 갖는 효력은 그보다 훨씬 후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즉 전쟁 당시에 살았던 선조들에 대한 전공(戰功)의 추인(追認) 여부에 따라 동족마을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의 마련이 가능했으며, 역으로 지연적 동족결합을 통해 추인을 받게 되는 사례들도 있었다.

조선에 종법이 시행되면서 나타난 현상들은 문중 및 동족마을의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 우선 사대봉사(四代奉祀)의 일반화 현상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정당화한 것은 ‘고조유복불가부제(高祖有服不可不祭)’, 즉 고조에 대해서도 상복을 입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는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이 대표적이며,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도 사감(四龕)을 설치하고 증조를 잇는 소종(小宗)인 경우는 서쪽 첫번째 실을 비워두고 조부를 잇는 소종인 경우는 두 개의 실을 비워둔다고 하여 사대봉사를 전제한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 사대봉사의 자격을 일반화한 것은 소종의 범주를 확대한 것으로 이에 의해 동고조팔촌(同高祖八寸)의 당내친(堂內親)이 상·제례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기본적인 친속(親屬)의 단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시행된 종법의 여러 특수한 현상들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대소종의 구분이 잘 지켜지지 않은 점이다. 이미 사대봉사의 일반화로 계고조지종(繼高祖之宗)이 된 대부분의 소종이 다음의 계오대지종(繼五代之宗)으로 넘어가는 데 따르는 제약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종의 양산(量産)을 가져오게 되고 특정 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확대재생산을 이루어 동족마을이 번성하는 결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종법에 따르면 원래 입후(立後) 또는 양자제도(養子制度)는 대종에 한하며, 소종은 입후를 요하지 않고 대가 끊기는 계절(繼絶)의 경우에는 대종의 조묘(祖廟)에 반부(班祔)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대·소종을 불문하고 양자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적통의 재생산은 대종뿐 아니라 소종, 즉 사조(四祖) 안에서도 철저히 이루어졌으므로 이것이 지켜지는 한 종족원의 수는 늘어나게 되며 최소한 줄어드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소종의 대종화는 이와 같이 계고조지종(繼高祖之宗)을 하는 장자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후대(後代)의 분기과정(分岐過程)에서 분파한 문중이 결성될 때 소급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수성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현상의 하나가 곧 묘제(墓祭)의 성행이다.

제사는 크게 집 안에서 하는 사제(祠祭), 또는 묘제(廟祭)와 집 밖에서 하는 묘제(墓祭)로 구분되며, 위토(位土)에도 제전(祭田)과 묘전(墓田)의 두 종류가 있다. 묘전은 원래 제전이었던 것을 5대조의 체천(遞遷)에 따라 제사 장소를 묘(廟)에서 묘(墓)로 옮기면서 묘제(墓祭)를 위한 전(田)으로 전환한 것이다.

제전이 원래 없었던 경우는 새로 설정하는 일도 있다. 중국에서는 사제와 묘제를 구분하여 기제사 범위인 4대까지는 사당(祠堂) 혹은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고, 5대조부터는 신주를 묘소에 매안(埋安)하고 이후 묘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묘를 흉사(凶事)로 여기지 않아 조천(祧遷) 이전에도 사제와 함께 묘제를 하는 관행이 있었고 제전에서 묘제의 비용까지 제공하는 것이 통례였다. 즉 두 가지 행사가 명확히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천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의 묘제가 이어지게 됨으로써 결국 소종이 소멸 또는 분기됨이 없이 묘제를 중심으로 오히려 확대되는, 즉 소종의 대종화 경향을 낳은 것이다.

백세불천의 부조묘는 종손이 중심이 되고 사당에서 행하는 기제 역시 종자를 중심으로 그 당내친들이 주체가 되지만, 묘제의 경우는 달라 그 주관은 문중성원 각각에게 분산되므로 결국 문중집단이 그 주체가 된다. 친족관계를 설명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의 하나는 그 관계의 차원이 개인인가 집단인가의 여부다. 기제는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범주의 개념이지만 묘제는 그 기준이 달라 집단의 차원에서 행해진다.

분가와 상속의 관행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개인이 속한 친족집단의 결속상태 여하에 따라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우리나라는 동거공재(同居共財)하는 중국과 달리 분가별산(分家別産)하여 동촌근리(同村近里)에 거처를 정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이는 부계상속분의 비중이 커진 상태에서 이를 배경으로 경제력을 확보한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곧 이상적인 분가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분가하더라도 본가 근처에 사는 분가방식은 가장적 가족제의 특질을 유지시켜 주어 이의 연장으로서의 문중 및 동족마을이 형성되어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상속방식도 마찬가지다. 상속에 있어서의 장자(長子)를 우대한 것은 종법의 원활한 시행을 위한 장치로 이해되며 딸에 대한 상속분(相續分)의 감소(減少)는 부계친족집단 외부로의 재산유출을 막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부계친족집단의 결속강화에 따른 대응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장자를 우대하는 불균분상속을 하게 되면 분가에 대한 본가의 우위가 지켜지고 분가하더라도 같은 마을에 거주하게 되면 상속에 의한 재산분산이 저지되기 때문에, 제사를 계승하는 입사(立嗣)의 원칙과 함께 수족(收族)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문중형성 및 이의 발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차등지급된 재산은 당대에 소모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대까지 상속된다는 점에서 상속분할량의 차이는 곧 불균등한 분기의 과정을 야기한다.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면서 다른 변수가 없는 한 점진적인 불평등이 심화되어 문중 및 동족마을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와 관련하여 반상(班常)의 신분 구별과 세습적 특권, 즉 양반신분의 유지는 당내친(堂內親)을 범주로 하는 특정 성씨들이 각자의 처당(妻黨) 및 외당(外黨)과의 연결을 통해 결사체를 이루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각 성씨가 지역적 연고를 갖는 부계친족들을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조직되어 영속적인 집단을 이루게 된 이후에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게 되었다. 15·16세기에 이루어진 입향시기를 고려하면 특권 양반층들은 2세기 후인 17·18세기에 이르러 문중을 형성하고, 18·19세기에는 이것이 진전되어 세분화된 생활공간인 동족마을 형태로 발전해간 것으로 일반화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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