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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성립과 전개

족보란 동일 씨족의 관향(貫鄕)을 중심으로 시조 이하 세계(世系)의 계통을 수록함과 동시에 씨족의 발원에 대한 사적(史蹟)과 선조로부터 시작하여 작성 당시의 동족원들에 이르기까지의 선대(先代)들의 이름과 호(號)·행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동족의 근원을 밝히고 그들의 행적과 소목(昭穆), 즉 세대의 순서를 알릴 목적으로 편수한 것이다. 우리는 족보를 통해 종(縱)으로는 시조에서부터 현재의 동족성원까지의 세계를 알 수 있고, 횡(橫)으로는 현재의 동족간의 상호 친소원근(親疏遠近) 관계를 알 수 있다.

족보는 일찍이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그 근원은 제계(帝系)라는 제왕연표에서 찾는다. 사인(私人)에 의한 족보는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문벌의 전성시기를 맞이한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에 들어와 가계가 존중되고 조정에서도 모든 집안의 보첩을 수집 심사한 후 이것을 갑·을 등의 등급으로 구분하여 세족(世族)이 아니면 고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족보 간행이 활발해졌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함으로써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고려 중엽 이후 작성된 『왕대실록(王代實錄)』, 『선원록(璿源錄)』 등을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역대 왕 및 왕족의 계보를 체계화하여 문헌으로 남긴 것으로는 신라 말기 최치원이 만든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처음이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성씨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고려 중엽 이후에는 위에 언급한 기록들이 작성되었다. 문종 이래로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가보(家寶), 가첩(家帖) 등의 용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족들도 가계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별도로 당대마다 계보를 정리·기록해 두는 기관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선원록(璿源錄)』과 『종친록(宗親錄)』을 만들었고, 종실 내부에서의 적서(嫡庶)의 명확한 구분을 위하여 『국조보첩(國朝譜牒)』, 『당대선원록(當代璿源錄)』, 『열성팔고조도(列聖八高祖圖)』 등과 외척·부마를 수록한 『돈녕보첩 (敦寧譜牒)』을 편찬하였다. 1679년(숙종 5)에는 선조의 친손인 낭원군(郎源君) 간(侃)의 상소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의 간행에 착수하여 2년 후에 1책으로 완성되었다. 이 책은 1931년에 이르기까지 각 왕대에서 부정기적으로 교정을 보고 보완하여 신하들에게 반포되었다.

1680년(숙종 6)에는 『선원록』 50권이 출간되었다. 이후 왕실에는 교정청을 수시로 별도 설치하여 『선원록』 수정업무를 맡아보게 하다가 1757년(영조 33)부터는 종부시(宗簿寺)에서, 종부시가 종친부(宗親府)에 합쳐진 1864년(고종 1)부터는 종친부 주관으로 그 업무가 계속되었다.

한편 종법(宗法)에 따라 왕의 형제들, 즉 대군(大君)이나 군(君)을 대종(大宗)의 파시조로 하는 전주 이씨 자손들은 제각기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만들어 왕실의 『선원보』와 연결시켰다.

한말 이후 일제를 거치면서 이씨 왕실의 왕권이 상실되자 신라의 박, 석, 김 3성과 고려의 개성 왕씨 등 이전 시기의 왕족 성씨들이 새롭게 선대가 왕족이었음을 나타내는 ‘선원(璿源)’, ‘왕계(王系)’ 등의 표현을 넣어 족보를 만드는 경향도 생겨났다.

왕실의 족보에는 그들과 인척 및 외척 관계의 성씨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 족보를 만들려는 일반 양반층들에게 잃어버린 선대의 계보를 찾고 파악하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처음에는 족보라고 하는 합동계보의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고 개별적으로 각자의 가계를 기록 보존하였다. 합동계보로서의 역사는 대개 17세기 후반경부터다. 이전에 발간된 초기의 족보는 주로 편찬자와 그 주변의 가승을 확대한 계보다. 편찬자는 먼저 자신의 가승을 만들고 그 가승에 나타난 역대 조상의 모든 자손들을 찾아 계보에 수록하는 방식으로 족보를 만든 것이다. 초기 족보에 편찬자의 직계조상들에 관해서는 기록이 상세한 반면 그 밖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초기 족보의 편찬자들은 거의가 다 현직 또는 전직 관리로서 명문 가문의 후예라는 점이 공통이다.

예를 들면 1423년(세종 5)의 『문화유씨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 1476년(성종 7)의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1565년(명종 20)의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1649년(인조 27)의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등이 초창기의 족보들이다. 이들 초기의 족보들은 대개 가계 대수(代數)가 얕아 가승(家乘)을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딸의 자손들, 즉 외손을 본손과 마찬가지로 세대의 제한 없이 족보 편찬 당시의 인원까지 수록할 수 있었다. 합동계보로서의 족보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전성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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