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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지역의 학교설립운동

애국계몽기를 시작으로 여주지역에 설립된 학교의 관련 기록을 연도별로 모아 보면 (표 5)와 같다.

다음 장에서 다시 거론하게 되는 장춘명 관련 기록은 현재 여주중앙감리교회 앞뜰에 세워진 「장춘명 목사 공덕 기념비(張春明 牧師 功德 紀念碑)」(1994년 11월 27일)에 의한 것으로, 그가 이 활동 당시 83개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과 활동시기를 보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신앙활동과 구국운동을 동일시했으며, 교육구국운동을 신앙 활동과 같이 전개한 그가 1898년에 그의 고향 삼군리에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과 연계해 그 교회에 학교를 세웠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신뢰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개신학교의 경우는 1910년에 세워진 개신학교와의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해본다면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설립연대나 설립사실이 오류로 『대한매일신보』에 기록된 1910년에 세워진 것이 개신학교의 설립연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관련학교로서 지역을 달리하는 제2, 제3의 개신학교가 믿음을 열어준다는 교명처럼 오늘날의 교회 성경학교와 비슷한 차원에서 개교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같은 1904년에 장춘명에 의해서 소성학교와 여흥학교가 설립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여흥학교는 공립여주보통학교의 전신으로 1910년에 폐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오류이다. 왜냐하면 공립여주보통학교가 폐교되었다는 것은 여주초등학교가 오늘날까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과 여주초등학교의 연혁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사립 여흥학교가 변천과정에서 공립화하면서 사립으로서 문을 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는 어찌해서 여주초등학교 연혁편에 의하면 사립 개진학교를 인수하여 공립여주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되었다고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주교육청에서 발간한 자료끼리도 서로 모순되므로 사료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즉 『여주교육의 흐름』 학교편에서는 “여주지역의 근대식 학교가 문을 연 것은 일제강점기인 1908년이다. 현재의 여주초등학교는 당시 여주심상소학교로 설립되어 근대식 교육의 첫발을 내디뎠다.”1)고 하였으나, 같은 자료의 『학교교육의 발자취』 초등학교-여주초등학교편 연혁에는 “1908년 5월 27일 공립여주보통학교 개교(사립 개진학교 인수)”라고 되어 있다.2)

여주초등학교의 경우, 개진학교의 후신인가, 여주심상소학교의 후신인가가 불분명하다. 아울러 개진학교의 인수에 의한 것이라면 개진학교가 당시에 이미 존재하면서 교육에 일정 부분 일익을 담당하고 기여했다는 점에서 개진학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며, 공립여주보통학교의 개편이 심상소학교의 후신이라면 심상소학교의 존재를 여주교육사에서 분명하게 독립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불분명한 요소는 있지만 당시 학부고시 제3호(1908년 4월 22일자)에 의하면 강화, 여주, 온양, 신천(평북), 고부, 영암, 통영, 밀양 등지에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3)

1908년 4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 국한혼용판의 기록에 의하면 공립학교 확장을 위해 여주, 평양, 강화에 학부관리들이 입지조건과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시찰한다는 기사가 있고, 같은 해 11월 12일자에 의하면 학부 관리들이 춘천, 원주, 여주, 충주, 청주 등지의 학교를 시찰한다고 한 기록 등을 미루어볼 때 기존의 부지와 건물을 인수하여 법령 공표와 함께 신속히 개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굳이 긍정적으로 종합해 유추하자면 ‘사립 여흥학교 설립 → 사립 개진학교로 개명→ 공립 여주심상학교(6년제)로 개편 → 공립여주보통학교(4년제)로 개편’으로 변천해가지 않았을까 가정해볼 수 있다. 그래도 개진학교의 인수라고 하는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공립여주보통학교가 1912년에 교내에 ‘여주공립간이농업학교’와 1921년에 ‘여주취실야학’을 운영하면서 교육에 기여한 공헌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금사보통학교의 존재는 『대한매일신보』 국한혼용판의 잡보 보도기사에 기록된 것으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普校懇親 驪州郡金沙面普通學校에셔日前에附近各郡學校와聯合여大懇親會를開고 各面里長지招待엿다더라.”4)

이 기사로 미루어볼 때 더 많은 보통학교가 여주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금사보통학교도 공립학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타의 불완전한 교육기관에는 보통학교 명칭이 정확하게 붙여지지 않은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신흥학교의 설립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국한혼용판 학계 보도기사로(1910년) 확인된다.

“新興其興 驪州郡川陽里紳士趙衡夏李建英洪鍾衍李德祐諸氏가昨年에多數金額을醵集야 該洞에新興學校를設立하고高明敎師를雇聘야靑年子弟를熱心敎育고로生徒가日益 增加야進就之望이大有더러該郡守李儒哲氏가該校에頻頻出席야學父兄及任員講師 諸氏를對敎育의目的과財務方針을硏究說明으로該校의基礎가確立되엿다더라”5)

이로써 그 전 해였던 1909년에 신흥학교가 설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개신학교의 설립에 관한 기록도 『대한매일신보』 국한혼용판 학계소식 보도기사(1910년)가 여주와 관련해 2가지 기사를 당일에 내고 있다.

“周窮捐校 驪州郡召開面面長林容植氏鰥寡孤獨의게白米三斗式賑給고開信學校에金十五圓을義捐엿다더라”
“開校漸進 驪州郡召開面三申洞耶蘇敎人張錫弘崔士順李聖先金聖彦金東振諸氏가資金을隨力義捐야私立開信學校를該敎堂內에設立고敎師吳炳喆林淳愚兩氏를雇聘야熱心敎育學徒가硝硝增加야前進의望이有다더라”6)

두 기사로 미루어볼 때 이 날짜보다는 앞서 학교가 개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여타 국민학교 설립의 명칭은 적어도 1941년에 가서야 비로소 법령화하여 시행되었던 것이니만큼 각각 보통학교로 칭하는 것이 바른 표기이다.

추가로 제시한 야학은 본래 정규교육이 가능하지 못하거나 사정상 비정규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피교육생을 위해 개설한 것이지만 일제교육에 저항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했던 점을 상기할 때 교육구국의 자취 중에서 비중 있는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당시 정규교육은 일제의 관제교육으로 일본인에 의해 편찬된 교과서를 사용하여 일본어를 필수과목으로 설정하는 식민지화 교육을 통해 한민족을 일본인화 하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7)

그런 점에서 사학인 야학은 비록 정규 교육과정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국어 해득과 계몽을 통해 문맹을 탈피하고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연히 민족의식을 유지·고취하는 중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8)

자료들이 미비점과 상충점을 지니고 있고 불완전하여 여주교육의 전모를 바르게 다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교육활동이 관 주도의 공립, 지역유지에 의한 민족계 사립, 주로 개신교 교인에 의한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각각 골고루 존재하였으며, 타지역에 앞서는 교육활동의 궤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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