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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신역은 요역과 군역의 두 가지가 있었다. 요역은 국가적 규모의 토목사업에 중점적으로 동원되었고, 요역기간은 부정기적·장기적이었다. 궁궐·성곽·관청·제방 등의 수축, 영선과 관물의 운반 등은 모두 농민의 요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조선초기는 국민개병제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장정은 모두 징발의 대상이 되었으나 토지경작 등의 문제가 있고, 입역기간 중에 백성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입역하는 정정(正丁)1)에게 여정(余丁)을 주어 봉족(奉足)으로 삼아 입역비용을 조달케 하였다. 호수(戶首)와 봉족체제는 토지경작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포를 바쳐 도와주는 것으로 1397년(태조 6)에 군역 편성의 기저로써 처음으로 봉족이 정급2)되었다.

1464년(세조 10)에는 호적개정사업과 호패제도 강화를 통한 탈적인구의 수괄을 전제로 보법체제(保法體制)를 확정하였다. 2정을 1보로 하는 보법은 호단위에서 인정단위로 개혁되면서 호와 유리된 보의 구조 자체가 군역제도를 문란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보인(봉족)의 재정적 보조는 매월 면포 1필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 호수와 보인과는 수탈관계에 놓이게 되어 예종(睿宗) 때에는 수탈이 면포 8·9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또한 번상·입번하는 군사가 토목·영선 등에 동원되어 군역의 요역화 현상도 일어나 군역과 요역의 양립이 무의미해졌고, 이러한 고역으로 인하여 번상을 타인에게 대신하게 하고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의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후 대립은 중간이득을 취하려는 이서(吏胥)·노복(奴僕)들의 강제적인 요구로 국가에서 공인하게 되었고, 대립가는 계속 상승하여 보인들이 도망·유리하는 결과를 가져와 도망자에 대한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洞徵) 등의 폐해를 낳게 되었다. 한편 각 지방 진관이나 각 포의 수군에는 지방관 스스로가 군포를 받고 귀가시키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널리 행해졌다. 지방관의 방군수포는 당초에 군사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사리(私利)를 위해 강요되었다.

군역은 왜란 후 군포제도가 지배적 형태로 되고 정(丁)수를 기준으로 한 호의 등급에 따라 배분되었으나, 봉건지배층과 결탁하여 납포를 면제당한 자가 많아 힘없고 빈곤한 양인농민들이 호당 4~5명의 양역을 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군포 부담의 폐해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해당계층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공전을 거듭하다, 1750년(영조 26)에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는 균역법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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