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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1980년대 이후 여주지역의 정치동향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고, 이제 곧 민주주의의 새날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국민들은 이렇게 찾아온 ‘민주화의 봄’을 민주정권 수립으로 귀결되기를 열망하였으나 유신체제가 유지되길 바라는 세력은 여전히 엄존하였기에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구시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세력은 군 내부에 사조직을 만들어 끊임없이 권력 지향성을 보인 일단의 신군부(新軍府)였다. 이들 정치군인들은 12·12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대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치권력도 손아귀에 넣으려 하였다. 결국 민중들과 학생들의 생존권 요구와 유신체제 유지를 저지하기 위한 민주화의 열기가 분출하자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신군부는 주요 정치인을 체포·구금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국회의원 대부분을 정치활동 규제로 묶었고 많은 언론인·교수·교사·공직자를 강제 해직했다. 또 정기간행물과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해 국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수만 명을 삼청교육대에 보냈다.1)

이러한 군사독재의 재편 음모에 광주시민들은 정면으로 대항하였고, 신군부는 그 항쟁을 총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광주의 이 ‘민주화운동’은 차후 우리 현대사의 진로를 제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비록 무참하게 진압되어 전두환 정권의 등장을 막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결국 1987년의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이에 정권은 국민의 저항을 위기로 판단하여 직선제 개헌 등을 내용으로 한 ‘6·29선언’의 미봉책으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결국 ‘6월민주항쟁’에도 불구하고 그해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군사독재의 연장인 노태우 정권의 창출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봇물처럼 쏟아진 국민들의 생존권 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의 정치는 특정지역에 기반한 일인 보스체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1987년의 대통령선거가 그러했으며, 심지어 1990년 1월에는 호남을 배제하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이 되는 삼당합당(三黨合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삼당합당은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되자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그 구도를 변화시키고 보수연합구도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총선의 민의에 반하는 위로부터의 정계개편이었다. 이 정계개편의 본질은 평화민주당을 호남지역에 고립시키는 지역주의에 기대어 정권을 연장하려는 의도였다.

1997년 12월 한국현대사 최초로 수평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사회문화적 역량이 성장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지역연합을 통해 탄생한 정부였기에 현대정치사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면의 역동적인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니,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1980년대 이후의 정치상황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비록 중앙정치와는 그 양상을 달리했지만 여주지역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그 양상을 1980년 이후 지역구 국회의원 총선거의 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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