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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지역경제·농촌사회의 발전과 그 명암

경제개발로 서울이 팽창하고 경기지역 역시 발전하였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서울에 종속하는 주변부화의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농촌사회의 발전이란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산업화·도시화를 말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경제개발계획의 결과 서울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수도권으로 형성되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특히 70년대에 이르러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교통망의 발달이었다. 전국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일일 생활권이 확대되었고, 1974년 8월에는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었다. 이러한 전국의 교통망 발달은 도시로의 인구 유입을 유발하여 산업화·도시화가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1955년 32.9%에 불과하던 도시인구 비율이 1970년에는 50%, 1975년에는 59%로 높아졌던 것을 보면 탈농촌 러시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경기지역은 1970년대 이후 인구증가율이 20%에 달했다. 이렇듯 급격한 인구의 도시 집중은 인구·주택·교통·공해·생활환경 등의 각종 도시문제를 야기하였는데 서울·부산 및 수도권 일대가 특히 심하였다. 한편 서울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강남개발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기도 개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수도권 전철의 개통은 경기 서남지역의 개발을 촉진하였다. 경기도의 눈부신 발전이란 것이 사실은 서남부에 편중된 것이었다. 북동부지역은 안보·군사상의 이유로, 동부지역은 환경보존이라는 차원에서 개발이 제한되었다. 물론 이런 제한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필요한 조치였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완장치가 마련되지 않음으로 인해 경제적 압박과 같은 해당지역의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경기도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다는 지리학적 위치와 더불어 서울을 시장으로 한 유리한 사회경제적 입지조건 때문에 발전을 위한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농업에 있어서는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하여 소채류, 특용작물 등의 상업형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였다. 또한 경공업 및 소비재 공업이 판로(販路)의 확보와 더불어 크게 성장하였고 서울과 밀접한 상업활동 역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입각한 발전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개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부와 남부에 집중된 것이었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정책에 따라 중화학공업이 정부 주도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발전이었지 여주지역 등 경기동부지역은 딴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별 가구 및 인구규모의 변동을 통한 산업구조변화를 살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 표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도지역은 농림어업의 1차 산업의 비율이 이미 1965년도에 이르러 절반이하로 떨어졌고, 1973년이면 30%에도 미치지 않는다. 또 1978년이면 20% 정도만이 농림어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여주를 비롯한 수도권의 동남부 지역은 오히려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출되고 인구감소가 초래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었다.

위 표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농가 호수가 꾸준히 늘었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 줄어 들고 있다. 또 1980년에 농가비율이 62%정도인 것으로 볼 때, 1970년대 후반부터 농가인구가 급격히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80년 우리나라 총가구에 대한 농가의 비율이 27%로 격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주는 여전히 농가가 전체 가구의 60% 이상을 차지한 것은 상대적으로 농업중심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주를 비롯한 경기 동남부지역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또 하나의 이유는 수도권에 대한 접근성이 불리해졌다는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여주는 육로와 수로에서 모두 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다. 여주-수원-인천을 잇는 교통로는 강원·충청지역의 산물을 수원과 인천으로 수송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수로는 그 생명을 다했고, 철도운행도 중단되었다. 물론 이것은 수도권이 경기 남서지역으로만 확대되어 갔고, 동남쪽의 끝에 있는 여주는 그 권역에서 제외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1971년에 영동고속도로의 여주구간이 준공되었지만 주민의 접근성이 향상되었을 뿐 지역의 산업발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따라서 여주는 다른 경기지역이 산업화·도시화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농업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당시 수도권에서 부각되는 다양한 도시문제가 총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다만 산업화에 소외되어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면서 지역경제가 침체되는 시기가 있었다.

여주지역 인구 변동 추이를 보면 1966년에 11만 851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는데, 1970년에 이르면 10만 1,048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8.8%인 9,803명이 준 것으로 1960년대 후반 급격하게 인구가 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70년 초반 잠시 인구가 늘었다가 다시 1977년부터 해마다 1~4% 정도의 인구가 감소한다. 이것은 경기지역이 경제개발로 산업화·도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주지역은 자체적인 산업화보다는 인구가 유출되는 대상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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