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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농어촌 개발의 명암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당시에는 농촌의 피폐로 점증하는 도시노동자의 식량공급이 어려울 지경이었고, 나아가 공업발전을 저해할 수준이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공업화를 이루기 위해 농업문제 해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몰락 직전인 농업·농촌의 부흥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고,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추진으로 나타났다.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유래 없는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간의 격차가 더욱 확대됨으로써 농촌이 피폐하게 되었다. 1970년대의 공업무분 취업자 1인당 생산액이 30만 1,000원인데 비하여 농업부분 취업자의 1인당 생산액은 7만 6,000 원으로 약 1/4에 불과하였으며, 1960년대 전반에는 도시근로자 소득을 상회하였던 농가소득이 1970년에는 도시근로자 소득의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농업의 낙후와 농촌의 침체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량 이농(離農)을 초래하였으며, 식량 수입에 따른 무역수지 악화, 국내 공산품 시장의 협소 등으로 성장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관련 시장의 창출과 농가의 구매력 증대를 도모함으로써 낙후된 농촌을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재편하려고 하였다.

한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는 박정희의 집권체제 강화구축을 위한 노력이 숨가쁘게 진행되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 있던 민중의 요구에 직면하였다. 이것이 표면화된 것이 1971년의 양대선거였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의 의석 비율이 14%나 하락했다. 도시에서의 하락으로 그치지 않고 강원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농촌에서 득표율이 일제히 하락했다. 이제 집권 여당의 주요 정치기반인 농촌의 지지율마저 떨어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위기에 정부는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강압적인 유신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내몰고 대중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일정한 보상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장기집권과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면서 지지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은 1970년 겨울이었다. 정부는 전국의 3만 3,267개 마을에 일률적으로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으로 지급하여 이동개발위원회를 중심으로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주민 협동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볏짚 지붕을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의 대체 개량·담장 바로잡기·마을 안길 정비 등이 주된 사업이었다. 농민들의 반응은 예상 외로 좋아서 정부가 나눠준 시멘트는 41억 원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성과는 122억 원에 달했다. 이같은 결과에 자극받은 정부는 1971년 겨울부터 환경개선 중심의 농촌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단순히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자는 차원의 운동은 아니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에 걸쳐 시행된 정부의 농촌개발정책인 ‘지역사회 개발사업’ ‘재건국민운동’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5·16군사정변 직후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중앙에 본부를 두고 시·도·군·구에는 지부, 읍·면·동·리에는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위원회 아래에는 청년회와 부녀회를 두고 정력적으로 농촌 개발사업을 추진했지만 농민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단기간에 끝나고 말았다.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정부가 주도하여 전국 각지에 비닐하우스·양잠·양송이·과실·담배·연안양식(沿岸養殖)·비육우(肥肉牛) 등의 주산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중앙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지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 90개의 주요 단지가 조성되었으며 정부보조금, 농협 융자금과 농가의 자체 자금이 투자되었다. 그러나 참여 농가가 많지 않아 성과가 미진하였다.

이렇듯 재건국민운동과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농촌의 위기가 지속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제창되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소득과 복지의 기본시설을 확충하여 주민의 자치능력과 자영 역량의 배양을 목표로 하였는데 주로 공동 이용시설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즉, 마을회관·공동 창고·농산물 저장소·공동 건조장·도정 공장·공동 축사·공동 퇴비장·공동 작업장·공동 구판장·공동 이미용소·기타 가공 공장·경로당·공동 목욕탕 등의 시설물 건축이 이루어졌다. 또, 마을 진입로 정비·마을 안길 정비·농로 정비·교량 건설·보(洑) 건설·도수로 건설·소류지(小溜池) 설치·선착장 설치·관정(管井) 타설(打設)·집수암거(集水暗渠)·양수장 건설·배수장 설치·하수구 정비 등의 광범위한 건설 사업을 벌였다.

또 ‘소도읍(小都邑) 가꾸기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지역개발의 거점으로 육성하여 준(準) 도시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기본 방침은 지역 특성에 맞게 향토색을 살려서 지역을 정비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관광지·철도변·고속도로변·정책 지역 및 주요 국도변의 도로망 등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공업단지 조성 또는 개별공장 시설을 유치하며 교통·통신·유통·금융시설 등의 확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즉 자체 생산능력을 가진 농촌 지역사회의 거점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주요내용은 가로정비·주택정비·시장정비·소(小)하천 정비 같은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저소득 마을 육성사업’이 추진되었다. 저소득 낙후 요인을 제거하여 자력 성장의 계기를 부여하고, 마을의 공동 소득원을 개발하여 마을간 소득 격차를 줄이고자 실시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경기지역의 다른 곳과는 달리 여주에서는 중점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더불어 ‘우수 새마을 특별지원사업’과 ‘도시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다. ‘우수 새마을 특별지원사업’은 우수 새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고 다른 마을에 대한 파급 효과를 기대하고 벌인 사업이었는데, 여주군의 경우 금사면(金沙面) 상호리(上虎里)가 선정되어 길이 4㎞ 폭 6m의 농로가 개발되었다.

마지막으로 농촌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주거환경은 주택을 개량하고 취락 구조를 개선하는 사업이었다. 기존의 주거환경은 능률적인 생활 양식의 도입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먼저 초가지붕을 개량하는 지붕개량사업부터 시작하였다. 여주지역 새마을운동의 현황을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여주지역의 새마을운동은 초창기인 1975년까지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 지원, 농로 및 교량 등의 건설, 지붕개량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1974년에 잠시 주춤했으나 그 다음해부터는 다시 활성화되었다. 특히 1977년과 1978년은 1만 3,266건과 1만 3,288건 등 가장 많은 성과를 냈다. 이 사업은 1983년까지 큰 규모의 성과를 내었으나 1984년에 1,950건 1985년에 516건 등 급격하게 줄었다. 이것은 새마을운동의 성격이 변화해 가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그동안 꾸준하게 성과를 거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농로 건설사업은 1972년에 78㎞를 건설하여 최대 성과를 올렸고, 1974년부터는 많이 축소되었다. 급기야 1983년을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 차원의 농로 건설사업은 중단하게 된다. 지붕개량사업은 1978년까지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해마다 약 2,000여 동의 개량사업이 있었는데, 1976년에 4,480동을 개량하는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78년 710동의 개량사업을 마지막으로 이 사업도 정리되었다.

1976년이 되면 새마을 소득 금고 특별회계사업이 추진되고, 다음해인 1977년부터는 마을금고가 개설되기 시작하는데 그해에 252개가 육성되었다. 이 사업은 1980년대가 되면 크게 축소된다. 먼저 금고수가 1981년도에 247개이던 것이 52개로 축소되었고, 2만 4,591명이었던 회원도 1만 4,931명으로 급감하였으며 자산도 줄었다. 이런 추세는 매년 계속되었다. 금고수가 1983년에는 35개, 1984년에는 9개로 줄었고 회원수와 자산도 점차 줄었다. 그러나 비록 금고수는 줄었지만 1984년부터 자산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로 전환되었다. 마을금고와 함께 마을문고 사업도 추진되었다. 1977년 시작된 이 사업은 그해 212개의 마을문고가 설치·운영되었다. 그러나 1982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214개가 운영을 중단하여 17개만 남게 되어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주택개량 등의 취락구조 개선사업은 1977년부터 수행되었다. 그해에는 111동의 주택 개량이 있었고, 1978년에는 420동의 주택개량이 있었다. 또 1979년에는 482동의 주택개량이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다른 사업과 달리 꾸준히 추진되던 이 사업은 1980년대에 이르면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든다. 1983년이 되면 32동의 개량사업만이 진행되어 차츰 새마을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잃어갔다.

소도읍 가꾸기 사업은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도시 새마을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소비 절약의 생활화나 준법정신의 일상화·안보 협동의 체질화·새마을 청소·시장 새마을운동·도시녹화·뒷골목 포장 등의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농촌지역의 생활개선이라는 것에 대한 성격이 변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예는 자연보호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새마을운동이 1979년부터 시작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연보호운동은 자연보호의 시설물 설치, 자연보호회 및 자연보호협의회 구성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1980년 이후 새마을운동 차원의 자연보호운동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은 많은 성과를 가져왔다. 농업의 생산기반이 확충되어 경제적 효과를 얻었으며, 문화복지환경도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농촌사회에 팽배해 있던 폐쇄성, 숙명론적 체념성, 지방 지향성을 짧은 기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타파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또 가시적인 성과도 컸다. 정부는 새마을사업의 기본 단위인 마을을 그 발전단계에 따라 3등급으로 분류했고 가장 낮은 마을은 기초마을, 그 다음은 자조마을, 가장 높은 마을을 자립마을이라고 칭했으며 이것들을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로 삼았다. 이에 따르면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자립마을의 자격 요건은 간선도로의 완성, 20m 미만 교량가설 완성, 지붕개량 80% 이상, 담장개량 80% 이상, 농경지 수리율 85% 이상, 마을 주변의 작은 하천 정비, 회관·창고·작업장 중 둘 이상 구비, 마을기금 100만 원 이상 확보, 농외소득사업 개발 추진, 호당 소득 140원 이상 달성이라는 10가지였다.1) 조사에 의하면 자립 마을의 비율이 1971년에 7%이던 것이 1979년에는 97%로 높아졌다. 이 통계는 다소 과장된 것이겠지만 그 성과는 매우 컸다고 하겠다.2)

그러나 이렇듯 가시적인 성과는 있었으나 총체적인 농업·농촌·농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발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즉, 새마을운동은 농민의 근면을 강조하는 반면 저임금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저곡가정책 실시라는 ‘저임금-저곡가’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관료적인 명령하달식의 운동도 초창기에는 농민의 적극 지지를 받았지만 자발성을 극대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지시가 농민 개개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추진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은 중앙협의회 → 시·도협의회 → 시·군협의회 → 읍·면 추진위원회 → 리·동 개발위원회라는 계통 조직이었다. 각 수준의 협의회에서는 정부 각 부문의 관료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3)

한편, 새마을운동은 1980년 ‘새마을운동 육성조직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 중앙본부가 설립됨에 따라 민간 주도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조직이 방대하고, 여전히 정부의 인적·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방만하게 운영하며 정치권력 지향적인 일탈적 운동 행태가 문제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초기의 농촌 개발사업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리적·정신적 성과를 얻어가면서 점차 비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건설사업을 넘어 정치운동으로까지 확대되는 과정을 밟아 정치적인 의미가 중요시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점차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는 상황을, 농민과 서민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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