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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의 성립과 억압적 정치환경의 창출

1960년대 말부터 외자(外資)중심 경제개발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채(外債)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차관기업의 절반 가까이가 부실기업으로 드러났다. 또 ‘선개발(先開發) 후민주(後民主)’의 억압체제에 대한 반감도 점차 표면화되었다. 이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와 뒤이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가 말해주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43.6%의 높은 득표율로 박정희를 위협했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은 개헌저지선인 69석보다 20석을 더 얻었다. 국제적으로도 닉슨독트린 및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냉전이 완화되면서 반공안보논리를 주요한 정권유지 논리로 삼고 있던 박정희 정부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오히려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였던 것이다. 급기야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헌법의 일부 효력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으며,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고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실시되었다. 이어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 공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유신헌법(維新憲法)이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국가권력을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집중케 하는 것이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폐지되었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또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여러 가지 억압적 법률을 만들었다. 노동법을 개악하여 노동 3권을 제약했으며, 언론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였고, 구속적부심(拘束適否審) 제도와 고문수사 규제 조항을 폐지하여 고문수사를 합법화하였다. 또 보안처분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수형자(政治受刑者)의 수감(收監) 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안전법’을 제정하였다.

유신체제의 강압성은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인 ‘긴급조치’로 극에 달했다. 긴급조치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9차례 선포되었다. 특히 긴급조치 제9호는 1975년 5월에 발포되어 유신체제 몰락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표현물에 의한 헌법의 개정 또는 폐기 주장·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긴급조치 비방행위 등을 일체 금지하였다. 여기에 이의 금지행위를 방송하거나 보도하는 행위를 불허하고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압수·수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초헌법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압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학생운동을 선두로 하여 각계각층의 사회운동이 촉발되었다. 1960년의 4·19혁명과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선두에 섰던 학생운동은 1971년 교련(敎鍊)철폐투쟁에 나섰고 이것은 1973년 10월 유신철폐투쟁으로 확산되었다.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등이 조직되어 반독재 연합전선을 형성하였고, 1976년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종교인·학자 등 다수가 참여하여 유신체제 반대를 선언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3·1민주구국선언’이었다. 이러한 유신반대 움직임에 박정희 정권은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정권에 반대하던 장준하(張俊河, 1915~1975)·최종길 등의 지식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같은 것을 통해 반유신(反維新)·반정부 운동을 탄압하였다. 결국 이러한 억압 정치는 정권의 몰락을 부채질한 것이었음이 부마(釜馬) 항쟁과 10·26사태로 증명되었다.

한편, 유신헌법은 전국의 행정구역 단위로 선출되어 구성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기 6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국민의 직접선거로는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단일 후보로 등록한 박정희 후보는 재적의원 2,359인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전원이 출석하여 투표한 결과 무효 2표를 제외한 나머지 2,357표를 모두 얻어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4공화국이 출범되었다. 그리고 1978년 7월 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9대 대통령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 대의원 2,581인 중 2,578인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된 투표에서 박정희 단일 후보가 찬성 2,577표, 무효 1표로 당선되어 1978년 2월 27일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 2기가 시작되었다. 유신체제기의 여주지역 정치 동향을 국회의원 현황을 통해서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제9대와 제10대 국회는 중선거구제에 의한 의원 선출과 유정회(維政會)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10·26사태 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1926~1980)에 의해 살해되었던 차지철(車智澈, 1934~1979)이 여주·광주·이천의 의원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는 1962년 예편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이후 제9대까지 4선 의원이 되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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