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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산업화의 진전과 사회·교육·문화상의 변화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던 60년대와 70년대 초반은 급속히 산업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서울의 팽창과 함께 경기지역의 변화도 수반되었다. 그러나 여주와 같은 경기도의 동남 끝자락은 이런 산업화의 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개발이 주로 경기 서남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63년 12월 인천과 유치경쟁을 벌였던 수원이 경기도청 소재지로 확정되면서부터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 서남부지역은 발전을 거듭하였고, 경기 남부와 동북부간의 지역차가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부지역은 경기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북부지역은 안보상의 문제로 개발이 제한되었는데, 특히 1968년의 1·21 청와대습격사건은 이 같은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주의 경우에도 안보상의 이유로 산업화 진전을 가로막았다. 여주는 군사훈련에 적합한 곳이었는데, 남한강의 하중도가 미군(美軍)의 헬기장과 군사훈련장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이렇듯 군사보호시설로 지정되어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였다. 따라서 경제개발 및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사회변화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시기는 오히려 여주의 많은 교육기관이 확대되던 때였다. 1960년 당시 총 39개였던 학교는 1971년에 44개로 증설되었다. 1960년 당시 학교의 대부분은 국민학교와 중학교였고, 국민학교의 경우에는 25개 모두가 공립이었다. 중학교는 10개였으며 고등학교는 4개였다. 고등학교는 모두 실업학교였는데 여주농업고등학교1) 대신농업고등학교2) 점동공업고등학교3) 여주여자가정고등학교4)가 그것이다. 즉, 당시 여주지역에는 인문계 고교가 없었으며 이것은 학교의 수요가 대부분 농업과 같은 직업교육에 치중했던 사회적 배경과 맞닿아 있던 것이다.

각급 학교의 변화 과정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위 표에 의하면 1965년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가 1967년에 1개 1969년에 1개가 추가로 설립되어 1971년 당시 총 30개의 국민학교가 운영 중이었다. 분교 및 분실은 1965년에 분교 1개 분실 6개였던 것이 그 다음해부터는 분실이 없어지고 분교가 7개로 늘었다. 그 이후에는 3~4개의 분교가 계속 운영되었다. 그런데 학교수는 늘었지만 신입생수는 1968년을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것은 전체 인구의 증감과 관련 있다. 즉, 취학 아동의 감소는 당시 국가에 의해 추진되어온 가족계획과 이농(離農)현상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주지역의 중·고등학교도 설립과 폐교 등의 변화를 겪었다. 1960년 중학교 10개 고등학교 4개였던 것이 1966년이 되면 중학교 8개 고등학교 3개였다. 중학교는 여주중학교·여주여자중학교·점동중학교·신성중학교·세정중학교·이포중학교·대신중학교·창명중학교였고 고등학교는 여주농업고등학교·여주여자고등학교·대신농업고등학교였다. 당시 각 중·고등학교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이 표에 의하면 1967년에 1개가 더 늘었는데, 이것은 1967년 3월 2일 재건중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또 1968년 12월 3일 신성상업고등학교5)가 설립되어 그 다음해 통계에 산입(算入)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 흥천중학교와 여강중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았다. 또 교사·재학생·진학생·신입생의 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특히 1968년과 1969년에 두드러진다. 졸업생은 1968년에 제일 많은 2,517명을 배출하였고, 그 다음해인 1969년에 1,272명으로 급감(急減)한 것이 주목된다. 이렇듯 중·고등학교의 재학생·진학생·신입생의 수가 국민학교 취학 아동이 줄어드는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증가한 것은 교육열 및 향학열이 뜨거웠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 현황, 특히 고등학교의 상급학교 진학수인데, 1966년에 가장 많은 33명이고, 이어 1967년에는 15명, 1968년에는 13명, 1969년에는 9명, 1970년에는 13명, 1971년에는 11명이었다. 한편, 당시 여주지역에는 2개의 유치원이 있었다. 모두 여주읍에 위치해 있었는데, 1926년 3월 5일에 설립된 여주유치원과 1954년에 설립된 소화유치원이 그것이다.

여주지역민들에게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도구였던 라디오는 일찍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1960년의 통계에는 1,070대의 라디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꾸준히 늘어 1962년에는 2,421대 1966년에는 3,261대로 늘어난 후 매년 1,000여 대 이상 늘다가 1970년에는 1만 1,261대로 만여 대를 넘게 된다. 이때는 TV도 많이 보급된 시기였지만 여전히 사랑을 받은 것은 라디오라 하겠다. TV는 군민들이 이용하기에는 여전히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일 것이다. TV에 대해서는 1960년부터 통계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이전의 상황은 파악하기 힘들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여주지역의 TV는 1대만이 보급되어 있었다. 더욱이 1963년의 통계에 등재된 1대도 관용(官用)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민용(民用)으로 TV가 보급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였으며, 대대적으로 보급된 것은 1967년이다. 관용 TV는 마을회관과 같은 공동체시설이 확대되면서 1970년에 9대, 1971년에 55대가 다시 보급된다.

문화생활의 측면에서 언급할 만한 것은 공연 및 상영시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66년 여주읍에 420명 수용규모의 극장이 설립되어 영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1년 여주읍에 건평 60평, 열람석 60석을 갖춘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한편, 문화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단체의 현황이다. 당시 여주지역에는 불교·감리교·성결교·장로교·천주교·성공회 등의 사찰(寺刹)과 교회들이 있었다. 불교 사찰의 경우 1960년대 초반에는 8곳이 있었는데, 1968년에 24곳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여주는 감리교가 많은 교회를 설립하여 교세(敎勢)를 자랑했는데 1960년대 초중반에 20여 곳 안팎이던 것이 1968년에 이르러 25곳으로 늘었으며 성결교의 경우 역시 3~4곳에서 1968년에 8곳으로 늘었다. 그런데 제7일안식교와 성공회의 경우 1960년대 초중반에는 교회를 갖고 포교를 했지만 그 이후에는 통계에 기록되지 않고 있다. 가톨릭의 경우 1963~1966년에는 11곳의 성당을 갖고 교세를 확장하였으나 오히려 1968년부터 6곳으로 줄었다. 이것은 성공회 성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1967년까지 한 곳의 성당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자료로 볼때 여주지역의 종교 현황은 1968년을 기점으로 교회와 사찰이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71년이 되면 장로교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것은 전국적으로 농촌교회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 하나 지역의 문화와 관련해서 뺄 수 없는 것이 1962년 상교리의 고달사지 승탑이 국보 제4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지정문화재가 생겼다는 것이다. 보물로는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탑비(제6호)와 원종대사탑(제7호) 석조대좌(제8호)를 비롯하여 신륵사의 조사당(제180호) 다층석탑(제225호) 다층전탑(제226호) 보제존자 석종부도(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제229호) 대장각기비(제230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제231호)이 있다. 이외에 창리 삼층석탑(제91호) 하리 삼층석탑(제92호)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총 20개의 보물이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이중 창리삼층석탑과 하리삼층석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북내면에 소재한다. 또 사적(史蹟)으로는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이 1970년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뒤이어 파사산성이 제251호로, 그리고 고달사지가 제382호로 지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내면 신접리에 있는 백로 및 왜가리 서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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