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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경제개발계획과 여주지역의 동향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 경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미국의 무상원조(無償援助)는 1950년대 후반에는 급격히 줄어들고 원조정책이 유상원조(有償援助)로 전환한 것이 경제개발계획 수립의 배경이 되었다. 이미 이승만정권 말기에 미국은 무상원조를 줄이고 차관을 늘리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한국으로 하여금 경제개발을 착수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경제가 급속히 악화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었다. 이렇듯 군사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논의되던 경제개발계획은 확고한 반공체제 확립과 ‘조국근대화’라는 구체적인 지향에 따라 입안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이라는 명분과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해서 주변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강력하게 개발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의 명분이 된 근대화 노선은 친미적 경향이 있는 후진국의 낙후성을 미국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는 점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 대응할 새로운 이념체계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었다.1) 이 노선은 삶의 환경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에 의거한 경제발전은 양적 성장을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의 비자립성(非自立性)이나 빈부격차 등 사회발전의 질적 측면은 무시하는 구조적인 문제의 발현을 배태(胚胎)하고 있는 것이었다.

1962년 1월 5일 ‘사회·경제적 악순환의 시정과 자립경제 달성의 기반 구축’을 기본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은 계획적 경제개발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계획은 경제성장과 대외지향적 공업화(工業化)를 기조로 하고 전략부문과 취약부문의 집중개발을 중요한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가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조의 확대를 통해 국내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반면, 박정희 정부는 차관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해 외국생산력을 국내에 이식시키고 이를 통해 한국경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깊숙이 편입시켰다.2) 이를 위해 우선 경제건설의 추진기구로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을 설치하여 국내경제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부정축재 처리라는 명목으로 재벌 기업이 보유한 은행주식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였고, 은행감독원에 금융기관 임원들의 임명승인권을 부여하여 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금융정책 등을 통해 대자본(對資本) 국가 우위를 점하였고, 국내 자본으로 하여금 제조업 중심 부문에 투자하도록 강제하였다.

경제개발의 효과는 큰 것이었다. 1차 개발계획 추진 기간 동안 연평균 7.8%라는 고속 성장률을 기록했고, 광공업(鑛工業) 부문의 급성장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산업 구조를 개선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전기업을 포함한 광공업의 연평균 성장률 14.3%, 농수산업 5.6%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8.2% 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수출도 신장되었다. 1966년에 2억 5,580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하였는데, 이중 62.3%가 공산품(工産品)이어서 수출 구조도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초공업의 빈약, 투자재원체제의 미비, 식량자급 실패, 소득편중과 같은 문제점도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1차 계획의 성공으로 한국경제는 개발가능성에 대한 자신감과 근대화를 위한 정책 의지가 더욱 굳어졌다. 이에 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에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더욱 촉진시키는 데 기본 목표를 두고, 대외개방 전략을 더욱 강화했다.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기계·전자 등 특정 산업을 진흥시키려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업계에서는 외자(外資) 도입은 많을수록 좋다는 의식마저 풍미하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한국경제는 광공업 부분의 주도로 연평균 9.7%의 고도성장을 이룩하였고, 이에 따라 도약 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석유·비료·화학·전자·공업 등이 성장함에 따라 공업 구조도 점차 변화하였다. 그러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는 계속 악화되었다. 1961년에 2억 7천만 달러였던 무역적자는 1967년에 5억 7천만 달러로 늘어났고 1971년에는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1950년대에 형성된 산업구조의 파행성과 취약성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소비재산업 중심의 공업구조 역시 개선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경제개발계획 추진 과정에서 한국경제는 대체로 계획치를 웃도는 고도성장과 수출신장을 나타냈다.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따라 산업구조에 변동이 발생, 1차 산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반면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비중은 계속 늘어났다. 이같은 산업구도의 변화는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경제개발계획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높은 성장률은 국민들의 왕성한 개발 의욕, 양질의 값싼 노동력, 국민 저축의 지속적인 증대, 외자의 대량 도입, 유리한 세계경제환경 등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도성장 구조는 돌이킬 수 없는 대외의존성을 심화시켰고, 투자 재원의 자립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투자재원의 50% 이상을 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외자의존적 고도성장 구조가 경제개발계획과 동시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외자를 이용하여 수출산업에 진출한 기업들은 정부의 재정금융 조세특혜와 저곡가(低穀價)·저임금(低賃金) 구조,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등에 힘입어 단기간에 독점 재벌로 성장하였다. 반면 농업 부문의 성장률은 정부의 저곡가 정책과 이를 위한 미국의 잉여(剩餘)농산물 수입 확대 등으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정체·하락하였다. 그 결과 빈농층이 급속히 몰락하여 엄청난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그중 일부는 산업노동자로 흡수되었으나 대부분은 실업·반실업 상태의 도시빈민이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경기지역도 많이 변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京仁) 공업지역은 식민지시대 이래 주요한 산업지역이었기에 초기 경제개발계획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인천과 그 주변지역에는 공업단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었고,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으로 공업지역이 확대되면서 경기지역의 공업도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제1·2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은 핵심 교통망(交通網)의 확충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 총 교통부문 예산 중 64%를 철도에 집중하였고,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도로부문의 투자 비율이 크게 증가하였다. 경기도의 경우 1965년 경인선(京仁線)의 복선화(複線化)가 시작되었고, 1968년 12월에는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러한 교통망의 확충은 지방인구의 지속적인 대도시 집중을 가속화시켰다.

한편,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어 경기지역의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경기 동부지역 특히 여주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당시의 각 산업에 종사하는 가구수(家口數)를 분석해보면 여주는 오히려 농업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965년 당시 여주군은 총 1만 7,544가구였는데 이중 77%인 1만 3,510가구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사업체수는 총 18개 업체뿐이었고 이중 광업(鑛業)이 3개, 제조업(製造業)이 15개였다. 그리고 금융업체가 2개 있었다.3) 그런데 1차 및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종료되던 시점인 1971년에는 전체 1만 7,089가구 중 84%인 1만 4,332가구가 농가여서 오히려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수가 더 늘었다. 따라서 경제개발사업으로 여주군이 산업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에 제시된 표를 통해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의 표에 의하면 전체 산업인구 중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한창이던 1968년에도 98.43%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개발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광업·제조업·건설업 등 2차산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상업과 기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제1차 경제개발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2차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7년부터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상업의 경우 1967년에는 5.21% 1968년의 경우에는 4.41%로 늘었고 기타서비스업의 경우 1967년에는 7.55% 1968년에는 4.56%로 증가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추세는 1960년대 말부터 그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며, 1970년대에 들어서는 산업별 총생산 비율에서 농업부문이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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