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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5·16군사정변에 대한 반향과 지역정치의 동향

이승만 퇴진 후 등장한 허정 과도정부는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바꾼 후 새정부 수립을 위해 1960년 7월 29일 민의원(民議員), 참의원(參議員) 선거를 실시하였다. 자유당의 몰락 상황에서 치러진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도의 경우 민의원의원(民議院議員) 정원 25명에 243명이 입후보하여 9.7 대 1이라는 전국에서 가장 격심한 경쟁률을 보였는데, 이 중 무소속이 180명으로 가장 많았고 민주당 61명, 자유당 13명,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6명,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2명, 한독당(韓獨黨), 혁신동지연맹(革新同志聯盟), 신정동지회(新政同志會) 각 1명이었다. 총 25명 가운데 민주당이 14명, 무소속이 11명 당선되었다. 참의원은 정원 6명에 대해 22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3.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민주당 3명, 무소속 2명, 자유당 1명이 당선되었다. 한편 총 58명의 참의원 중 경기(京畿) 출신은 1부와 2부에 각각 1명씩 2명이 당선되었는데, 이것은 도(道) 전체의 정원 6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고, 여주 출신은 1명도 없었다.1) 또한 1960년 12월 26일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선거에서도 경기도의회는 전체 46명 가운데 민주당 21명, 무소속 14명, 신민당 11명이 당선되었고, 수원·인천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 출신이 당선되었다. 즉 1960년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 경기도의 경우, 민주당이 의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권력 배분을 둘러싼 분열을 거듭하여 신(新)·구파(舊派)로 나뉘었고, 1960년 2월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함으로써 완전히 분열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권력배분을 둘러싸고 정쟁(政爭)으로 일관하는 동안, 사회 각계에서는 자립경제의 수립, 자주통일의 달성 등 더욱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정부는 경제활성화 방향을 미국의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했으며, 1961년 2월 8일에는 미국이 한국정부에 대해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한 ‘한미경제 및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자립경제의 수립을 주장하던 청년학생층과 혁신세력, 민중운동세력은 “이 협정을 ‘종주국과 식민지 간에 있었던 전근대적 협정”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2) 이런 정국 혼란은 군부의 일부 세력에게 군사정변(軍事政變)의 명분을 주게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1917~1979)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민주당 정권하에서 통일·민중운동이 성장하는 것에 대해 군부가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3)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전권을 행사하였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정책은 반공(反共)정책의 강화, 유엔헌장의 준수, 부패 일소, 자립경제 수립, 통일을 위한 노력 등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박정희를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개발에 필요한 지원을 얻는 대신 한일(韓日)회담 추진과 베트남 파병을 약속하였다.

또한 5·16군사정변은 지방행정의 변화도 가져왔다. 주도세력은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중앙 중심의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방자치 기능을 정지시켰다. 쿠데타가 발생한 그날부터 지방의회가 해산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린 포고령 제8호에 따라 그 기능을 읍·면에서는 군수, 시(市)에서는 도지사의 승인을 얻은 집행기관의 장이 시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지방자치는 이후 30년간 중단되고 말았다. 1961년 9월 1일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 조치법」(법률 제707호)은 국가재건회의 포고를 추인한 것이었는데, 지방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바꾸고 군(郡)을 기초적 지방자치단체로 하는 한편, 읍과 면을 군(郡)의 하부 행정기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기도도 몇 개 군(郡)의 행정구역이 조정되었다.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통과된 새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다시 대통령중심제로 환원시켰으며, 대통령 선출도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환원시켰다. 이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경기지역에서는 257개의 투표구에서 85.9%의 도민이 참가하고 여주도 3만 9,205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총 유효표의 46.6%를 얻어 45.1%를 득표한 민정당(民正黨)의 윤보선(尹潽善, 1897~1990) 후보를 약 15만여 표차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여주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1만 6,001표를 얻은 반면 윤보선 후보는 1만 7,889표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여주가 야당색(野黨色)이 강한 지역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1963년 11월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해 선거사상 처음으로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의 2가지로 구분하여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지역구였던 여주는 양평(楊平)과 합해져 경기도 제7지역구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양평 출신의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후보였던 이백일(李白日)이 총 7만 6,464표 중 2만 1,425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당시는 무소속 입후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정당 추천을 입후보 요건으로 정했기 때문에 무려 12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모든 정당이 여주·양평의 지역구에 후보자를 출마시켰기 때문에 불과 28%의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재선되었다.

그러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나선 천명기(千命基)가 당선되었다. 당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된 직후였고,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 204명 중 55.4%에 달하는 113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상황이었다. 특히 경기지역은 지역구 의원정수 16명에 대해 공화당 당선자가 11명(68.8%)이나 되어 전국적으로 공화당 출신 당선자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재선의 현역 의원을 누르고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직전에 실시되었던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더 많은 득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1971년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경기지역은 81.09%의 투표율을 보였는데 야당후보인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69만 6,582표를 획득해 68만 7,985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를 앞섰다. 뿐만 아니라 여주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1만 9,147표를 얻어 1만 8,796표 획득에 그친 박정희 후보를 앞섰다. 이것은 경기도 지역의 산업화·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투표 성향을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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