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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귀속기업체 불하와 1950년대의 여주 경제

농지개혁에 이어 정부의 2대 시책 중 하나인 귀속재산 불하는 정부에 귀속되어 있는 기업체를 민간에 이양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윤추구욕을 증대시키고, 농업 중심이 되고 있는 한국경제를 공업화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다.

여주는 농업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업지역이므로 귀속기업체는 여주읍 하리에 주소를 둔 여주제와공장(驪州製瓦工場)과 북내면 오학리에 위치한 조선도기주식회사(朝鮮陶器株式會社) 2개에 불과하였다. 조선도기주식회사는 1936년 12월 일본인과 한국인이 45만 원을 합자하여 경성부 종로3정목 63에 본점을 두고 여주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는 일본인 나가시마(長島明白)가 사장을, 최기영이 취체역(取締役) 사장을 맡았다고 하는데1) 1941년경의 자료를 보면 나가시마의 이름은 빠져 있고 취체역 회장에 설원식, 취체역 사장에 최기영, 이사에 우윤기·구종태·이봉구·오진섭·강대원, 감사에 박수경·조익선으로 경영진이 구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2) 총 9,000주 가운데 최기영이 1,160주, 설원식이 1,000주, 조양선이 800주, 강대원이 700주, 우윤기와 오진섭이 각각 600주, 이봉구·전낙규·설의식이 각각 400주를 소유한 대주주였다.

조선도기주식회사는 일본인들의 도자기 수요와 총독부의 수출정책에 부응하여 의욕적인 출발을 보였으나 1941년경부터 자금 부족으로 고전을 거듭하면서 운영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회사 경영자들이 총독부가 지원하는 사업자금을 보조받거나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금을 확충하는 등 회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3)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대비한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고 생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군수산업이 아니었던 도자기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귀속기업체로 분류되어 경기도의 관리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소유한 기업이거나 일본인 소유 주식이 있는 기업체의 경우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정부에 귀속되었다. 조선도기주식회사는 1941년 일본인의 주식 보유율이 40% 정도였으나 이후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금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자금이 대거 유입되어 일본인의 주식 보유율이 50%로 상승하였다. 경기도 관할 기업체였던 조선도기주식회사는 1955년 5월 15일 우선권에 의하여 관리인 최종선에게 6억 4,446만 환에 불하되었는데, 일시불 2억 60만 환에 5년 분납의 조건이었다.4)

여주제와공장은 일제시기의 자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소유의 소규모회사였던 것 같다. 1949년에는 귀속기업체 명부에 수록되어 있으나 그 이후에는 명부에서 누락되었다. 아마도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유실되거나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속기업체라고 하더라도 소규모 기업체는 자금과 자재를 모두 정부에서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인이 임대하거나 위탁경영을 하며 경영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정부에는 일정한 임대료만 납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므로 영세한 규모의 사업체들은 관리인의 운영 자금 부족과 원료부족 등으로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5)

1950년대 여주군에는 2개의 귀속기업체 외에도 군소(群小) 도자기 생산업체가 산재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자기(瓷器)와 도기(陶器)를 여주의 특산물로 꼽았고, 조선 초기에는 금사면 궁리, 북내면 오금리, 강천면 가야리에 도요지가 조성된 것으로 보아 여주의 도자문화 전통이 뿌리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주의 자연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조선도기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여주의 도자기 업체들은 주로 북내면에 집중되어 있는데, 도자기 산지의 중심인 오학리와 현암리에는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심층 풍화토의 백토(白土), 도토(陶土), 점토(粘土)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싸리산’이 있다.

15세기 전반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르면 관수용(官需用) 자기를 토산물로 공급받아 왔는데, 15세기 후반에는 전국 도자기의 공물로는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워졌다. 국가에서는 법으로 사기장(沙器匠)을 소속시키고 한성과 가까운 광주(廣州)에 국가에서 직접 사기를 생산하는 사기제조장(沙器製造場)을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물이 광주 분원(分院)의 설치였다.6)

여주 나루터의 맞은편에 있는 오학리는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원료를 광주 분원(1652년 설치)에 실어 내가는 집적지(集積地)였으며 도자기 원료산지인 영월, 충주, 청풍지역에서 실어오는 원료들이 남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광주 분원에 운송될 때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였다.7)

구한말에 광주 분원이 폐쇄되면서 분원의 도공들은 가까운 여주·이천에 자리를 잡고 민수용(民需用) 백자를 구우면서 ‘점말’을 형성하였고, 흥선대원군 시대에는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강천면(康川面)에서 은거하면서 옹기(甕器)를 굽기도 하였다.8) 여주의 도자기문화는 도공(陶工)들의 선진적 기술전파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으며 1892년 이희풍, 1907년에 김현채, 조원식이 등요(登窯)를 축조하면서 도자기 주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06년에는 장규환이 자기(瓷器) 공장을 설립하고9) 1917년 도미타(富田儀作)가 조원식이 운영하는 요(窯)를 인수하여 고려자기와 조선백자를 생산하는 제조장으로 만들면서 여주도 공장제 시스템의 도자기 업체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주생산품은 재현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생활자기, 전신주용(電信柱用) 애자 등이었다.

1932년 일제의 중앙시험소 요업과(窯業科)는 여주 일대를 조사하고 여주의 도자 산업 실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주요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에서 제조하는 도기로 그 제조공장은 여주읍에서 북쪽으로 약 10리 떨어진 산간의 20여 호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다. 제조업은 계(契)를 조직하여 당시 계주였던 장규환, 김현채, 함녕섭과 그 밖의 인부 잡역(雜役) 등이 종사하고 농업을 부업(副業)으로 하였다. 이들 제조자는 각각 조선 전래의 환요식 등요와 제토, 성형, 기타에 필요한 기계 기구를 설비한 작업장을 가지고 각각 수명의 직공이 전속하여 주로 조선 식기(食器)를 제조하였다. 1년간 생산액은 1만 원에 달했으며 판로는 부근에 있는 한강의 수운이나 읍내의 철도를 이용하여 서울, 경기도, 기타 지역으로 출하하였다”10)

중앙시험소 측은 여주의 우수한 원료를 활용하여 품질을 개량하고 수출을 진흥하려는 목적으로 1931년 4,000 원의 국고보조금으로 오금리에 도자기제조 공동 작업장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우선 일본에서 숙련기술자 2명을 초빙하여 공사 감독으로 임명한 후 개량된 원료조합법과 제조기술을 전수하도록 하고, 계원의 자제들에게는 중앙시험소의 개량법을 수습시켰다. 그리고 등요와 제토, 성형, 갑발(匣鉢), 제조형(製造型)에 필요한 기계기구를 설비한 공장을 완성하여 조선식기 제조에 착수하였다.11) 이후 조선도기주식회사가 1936년 12월 설립되면서 여주의 도자기 생산은 활기를 띠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말 전시통제 경제의 시행으로 위축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귀속기업체인 여주제와공장, 조선도기주식회사 외에 한양요업사, 삼성요업사, 한양전기산업자기공장(고려자기공장), 한양통신기계제작이 오학리와 현암리에 신설되면서 소규모 도자기 단지를 형성하였다.

조선도기주식회사를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자본금 120만 환, 종업원 4,560명의 중규모(中規模) 공장들이었고12) 생활 자기와 전신주용 애자, 통신기기를 생산하였다. 조선도기주식회사는 6·25전쟁기에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13) 전술한 바와 같이 관리인 최종선은 1955년 6억 4,446만 환에 불하를 받고, 일시불로 2억 60만 환을 납부하면서 운영을 재개하였다.14) 그 외에도 가내(家內) 수공업체들의 광범위한 존재는 이후 여주가 도자기 산지로 특화되는 기반이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여주의 지역경제는 미곡 생산을 주로 하면서도 구래의 가내수공업체들과 조선도기주식회사, 신설된 중소 도자기공장들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도자기 생산지역의 명맥을 이으면서 도자기 특산지로서의 재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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