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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피해와 사회문화적 변동

약 3년간 진행된 전쟁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6·25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손실은 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한정된 자료에 의해서 그 수를 추정하면 아래 표와 같다. 즉 학살을 포함한 사망자가 민간인 37만 4,000여 명과 군인 2만 9천여 명으로 도합 40만 3,000여 명이고, 납치·실종·포로 등 남한에서 유출된 인구수는 민간인 약 38만 8,000 명에, 군인 17만 1,000여 명으로 총 55만 9,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경기도 지역은 38선으로 횡단된 지역적인 특수성과 수도를 중심에 두고 심각한 공방전을 벌였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그 피해의 정도가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였다. 전후(戰後) 정확한 통계가 작성되기 어려웠고, 또 통계를 주관하는 기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근거로 여주 및 경기도 전역의 인명피해 합계를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경기도 합계는 개성, 개풍, 장단, 옹진, 연백 등 북으로 편입된 몇몇 시군을 제외한 경기도의 나머지 19개 시군(인천, 수원, 고양, 광주, 양주, 양평, 포천, 가평, 여주, 이천, 용인, 안성, 평택, 화성, 시흥, 부천, 김포, 강화, 파주)의 수치를 합한 것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머물고 안정기에 접어든 1951년 9월 1일 현재의 상황이다. 사망과 납치, 행방불명, 부상을 모두 포함한 인명 피해는 경기도 총수가 4만 5,078명으로 나타나고, 그 가운데 여주군의 경우는 2,686명으로써 경기도 인명 피해의 약 6%에 달하고 있다. 이 같은 수치는 당시의 인구를 고려해 볼 때, 친족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를 입지 않은 가구수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전쟁은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나아가 가족공동체를 죽음과 생이별로 해체·단절시켰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는 이토록 심각했기 때문에 전황의 흐름에 맞춰 이들 난민에 대한 대책이 미약하게라도 마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경기도는 입지 조건상 피난민의 통로나 집결지로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행정적 조치라도 취해져야만 했다. 이에 정부는 경기도 사회국장을 수반으로 『경기도 구호대』(대원 약 50명)를 편성, 1951년 2월 18일자로 평택에 파견주재시키고 난민응급구호작업을 실시케 하였다. 이후 전세가 점차 호전됨에 따라 같은 해 2월 24일 구호대는 평택에서 수원으로 북상하였고, 안성, 평택, 화성, 용인, 수원, 서부광주 지구에 집결된 난민을 대상으로 구호작업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경기도청이 1951년 3월 부산에서 수원으로 복귀하여 임시청사를 식산은행 수원지점(이후 다시 화성군청으로 이전)에 두면서 구호행정에 도청직원의 배치를 단행하는 등 행정력을 구호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140만 명을 넘는 난민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51년 4월 5일, 2회에 걸친 중국군의 춘계공세 때문에 또다시 남하소개 태세를 취하는 등(당시 주로 안성, 평택, 화성, 아산 등지에 집결 소개됨)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수일 후 전세의 호전에 따라 구호사업은 다시 종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자 경기도 내의 난민수는 어느 정도 감소되었으나, 31만 명을 오르내리는 난민에 대한 구호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이에 소비적 임시구호를 가급적 지양하고 항구적인 정착구호로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으며, 특히 원주지(原住地)에 복귀할 가능성이 없는 난민을 위해서는 도내 미개간 유휴지 등을 최대한 개발 이용케 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항구적인 생활토대를 마련해 주는 정책이 필요했다.1)

당시 경기도 전역의 난민과 세대수는 1951년도 현재 29만 3,233세대/141만 1,828명, 1952년도 31만 8,262세대/158만 5,403명, 1953년 31만 6,915세대/158만 9,053명, 1954년 28만 6,132세대/141만 9,279명, 1955년 25만 1,708세대/126만 7,970명으로 집계되는바,2) 전시 경기도 총 난민수는 대략 30만 세대, 15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여주 지역의 전시 난민수는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원주빈민호구(原住貧民戶口)와 전재민호구(戰災民戶口), 피난민호구(避難民戶口)를 포함해 약 1만 세대, 4만여 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같은 수치는 전쟁 이후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이북 출신 난민으로서 여주군에 정착한 이들을 위해 정부에서 실시한 대표적 난민안착사업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1954년 4월 15일 216세대 1,325명에게 여주군 능서면 백석리 임야 143정을 밭으로 개간 승인한 사업, 1954년 12월 30일 100세대 640명에게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하천부지 100정을 논과 밭으로 개간 승인한 사업, 1955년 10월 15일 140세대 784명에게 여주군 점동면 덕평리, 원부리, 당진리 임야 121정을 논으로 개간 승인한 사업 등이 그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한반도 인구의 지리적 이동, 혹은 타지로의 이주·정착은 서로 다른 지방 사람들과의 접촉이 왕성해져 상호이해가 증진되는 동시에 전통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상당부분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구변동을 통해 지역사회내부의 위계적 관계가 느슨해져 전통적 신분질서가 급속도로 해체되어갔으며, 여러 지역의 언어·풍속 등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이처럼 인구의 광범위한 혼합경험을 가져왔다는 점, 즉 그동안 서로 고립·폐쇄적이던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사회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3)

한편, 전쟁으로 인한 이 같은 인명피해와 인구이동은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 미망인을 낳았다. 이는 이 시기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한 고아원, 양로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전쟁기간과 전쟁 이후, 경기도내에 신설된 이러한 사회시설은 통계에 포착된 수만도 육아원 64개(6,589명 수용), 양로원 5개(261명 수용), 모자보건원 2개(268명 수용), 허약아보호원 1개(35명 수용), 영아원 1개(44명 수용)에 달하며, 1952년에서 1955년까지 이들 시설에 수용된 인원은 매년 평균 7~8,000여 명을 상회하고 있다. 여주군에도 여주읍 교리에 위치한 기독교계 사립고아원인 ‘여광원(麗光院)’이 정부의 인가를 받아 약 90여 명의 어린이를 돌보고 있었다.4)

전사, 납치, 학살 등으로 인한 미망인의 수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1952년 3월 현재 전국 미망인의 숫자는 29만 명을 초과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당시 여주군만 하여도 전후 미망인수는 총 3,219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들의 부양 아동수는 6,004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역할과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유교적 고정관념은 서서히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피난시절 구멍가게를 차려 장사를 하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하는 음식장사 등은 대부분 여성이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외에도 급한 돈의 마련, 귀금속류의 저축과 판매 등은 모두 여성이 주로 하는 임무였다. 1950년대 이후 증가되는 여성의 사회진출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5)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는 개인과 가족공동체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참혹한 상흔을 남겼다. 동시에 가족내부 및 지역사회의 전통적인 관계를 이처럼 급격히 변동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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