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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후퇴와 전선의 교착

전쟁의 3단계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혀서 유엔군이 전체 전선에서 총퇴각하여 평양(12. 4), 흥남(12. 24), 서울(1951. 1. 4)에서 차례로 철수하여 오산 근처까지 후퇴했다가 반격에 나서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3. 14) 38선을 다시 넘어(3. 24) 중부전선의 요지인 철원, 김화 등을 점령했으나(6. 11), 비밀리에 공군을 참전시키고 있던 소련이 휴전을 제기함으로써(6. 23) 휴전교섭으로 들어가는 때까지이다. 이 동안 여주지역에서는 미 24·25사단, 국군 6사단 등과 중국군과의 전투가 치열했다.1) 현재 여주읍 단현1리 남한강가에 위치한 무어장군 추모비는, 1951년 2월 24일 헬기 사고로 이곳에서 사망한 미 9군단장 무어(Bryant E. Moore) 소장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여주지역의 다급했던 전황을 소리 없이 전해주고 있다.

이 시기 최대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맥아더의 전쟁확대론이다. 중국군이 개입하고 유엔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맥아더는 전쟁확대론을 내세워, 만주지방을 폭격한 후 타이완의 장개석군을 한반도 전쟁에 이용하고 또 중국의 남부지방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확전론은 미국 내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켰으나, 소련이 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 행정부에 의해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1951. 4. 11), 미국의 한반도정책도 미국 영향 아래에서의 통일노선으로부터 교섭에 의한 전쟁종결노선으로 바뀌어 휴전교섭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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