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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의 재정구조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제1공화국기의 재정제도는 해방 이후 일본의 재정제도를 답습한 과도기적인 미군정기의 재정제도 극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재정과 관련된 법의 제정과정을 살펴보면 일제시대는 일본의 회계제도, 미군정기는 미국의 회계제도 등이 그때그때 적용되었을 뿐 이에 대한 독자적인 기본법은 없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당시 재무부 회계국 국고국장 김홍기(金洪基)의 초안으로 국회의결을 거쳐 9월 법률 제217호로서 10장 85개조의 본법이 공포되어 10월 10일부터 시행되었다. 그후 각 재정관계 법령이 제정 공포되어 오늘날 한국재정제도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1949년 7월 4일 법률 제32호로 지방자치법이 공포됨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자주재정권을 가지고 재정을 운영하여 지방의회의 의결로 예산편성 집행을 하여 왔으나 재정구조 면에서 중앙과 지방의 재정이 격차가 극심하여 지방재정은 완전히 국가재정에 의존하게 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60년 이전까지의 재정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빈곤한 재정과 재정제도의 미숙,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여주군은 물론 10개 읍면이 진통을 겪은 시기였다. 1950년대의 지방세 체계는 아래의 표 1958년 지방세 체계와 같다. 여주군의 지방세는 크게 도세(道稅)와 군세(郡稅)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자료의 미비상 1950년대의 구체적인 지방세 수입액을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지방의 재정이 너무나 빈약하여 국가 보조금이 없으면 운영될 수 없는 구조였다. 당시 군 재정구조를 보면 지방세 11.2%와 세외수입 32.1%로, 재정자립도는 43.2%에 불과하여 56.7%가 지방교부세와 보조금 등 국가재정에 크게 의존하는 실정이었다.1)

이 시기 재정상황은 극히 열악해서 여주군의 경우, 해방 직후 소실된 여주초등학교 재건도 여주군청의 재정이 아닌 문교부의 보조를 받아 2층 교사를 건축하였다. 또한 여주군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의 교량가설은 여주군민의 오랜 숙원사업의 하나였으나 자체 예산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당시 부임했던 곽종석 군수서리가 진정서를 작성하여 국가재정의 보조를 받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량의 공사도 한국전쟁을 통해 중단되고, 미8군의 도움으로 임시 목교(木橋)를 가설하였으나 대홍수와 해빙기에 유실되었으며, 결국 정부 당국에 수차례 진정하고 요청한 결과 5·16군사 정변 이후 예산을 확보하여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여주 읍내에 우물이라고는 군청과 경찰서, 읍사무소 등 3개소밖에 없는 실정으로 대다수 군민들은 강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여주읍내 상수도 공사를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섭한 끝에 국회의 예산 통과로 여주 상수도 공사를 착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사도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고 전후 복구과정에서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2)

읍면단위의 경우 금사면 등 재정자립이 가능한 몇 개의 면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면사무소나 주재소 직원의 월급도 기한을 지켜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황이 다반사였다. 재정자립이 가능한 경우도 기본적인 항목에 대한 부분을 넘어 면내 자체 계획에 따른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재정규모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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