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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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의 경제기반

이승만 정권기인 1940년대 후반~1950년대의 여주지역은 인근 지역인 이천, 양평군과 마찬가지로 80%가 넘는 여주군민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상공업은 10% 이하에 불과한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지역은 전체 토지 610.92㎢의 56.1%가 산으로 되어 있으며, 곡식을 심을 수 있는 평지면적은 30%인 183.2㎢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논이 105.95㎢여서 총경지면적의 57.3%를 차지하고 있으며, 밭이 77.3㎢로서 총경지면적의 42.7%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여주지역은 쌀을 중심으로 한 논농사 중심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리, 밀, 콩, 팥 등의 잡곡이 생산되고 있었다. 한편 전 토지의 반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져 임산물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소출은 미미할 정도로 작다. 또한 남한강이 관통하고, 그 강을 상대로 살아가는 여주군민도 있지만 그 수치는 작으며, 벼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다.1)

여주군은 전형적인 농업지대로 상공업의 비중이 10%도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여주지역의 상공업 현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도자기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좋은 고령토가 곳곳에서 나고 내화토가 많아서 사기흙을 쉽게 구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북내면 오금리를 중심으로 조선도자기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북내면 오금리는 일찍이 광주군 분원리에서 이조백자에 능숙했던 도공이 조선 말기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마터로 잡고 분원백자를 구워내면서 점말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인 김현채를 중심으로 동리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여주의 도자기 산업은 일제에 의해 1936년 12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45만 원을 합자하여 조선도자기(주)가 설립되고, 그 공장이 북내면 오학리 한강 기슭에서 여주지역의 중심산업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2) 해방 직후 조선도자기(주)는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정부에 귀속되었는데, 경기도 관할 기업체였던 이 회사는 1955년 5월 당시 관리인 최종선에게 불하되었다.

또 다른 도자기산업체로 여주읍 하리의 여주제와공장이 있었다. 여주제와공장은 일제말기에 설립된 소규모의 회사이다. 해방 후 여주제와공장은 적산이었기 때문에 귀속기업체로 분류되어 1949년의 명부에 올라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운영자금 부족과 원료 부족 등으로 이 회사는 유실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 심성택이 대표로 있었던 한양요업사와 김상철의 삼성요업사, 이민용의 한양전기산업자기공장 등이 있었다. 이들 업체들은 자본금 100~200만 환, 종업원 50~70명 정도의 소규모 공장으로 생활자기와 전신주용 애자, 전기용품 등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민용은 한양통신기계제작소까지 운영하였는데, 무선기 등을 생산하였으며 자본금 150만 환에 45명의 직원을 둔 소규모 공장이었다. 그리고 여주읍내에 여주주조공장(驪州酒造工場)이 있었다. 여주주조공장은 여강 건너 학동의 조선도기주식회사 창설에 관여하였던 이봉구가 창업하였다.3)

이 외 여주지역에는 세 곳의 광산이 있었는데, 특히 금사면의 두 광산이 규모가 컸다. 금사면은 금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 해서 금사라는 지명이 생겼듯이, 이곳 금사지역은 금을 캐던 광산이 두 곳이 있었다. 상호리 여수금산과 소유리 팔보광산이 바로 그곳인데, 금덩이를 몰래 삼킨 광부가 금덩이에 묻은 독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금이 많았다고 한다. 1953년 『전국주요공장광산명부』에 의하면 여주광산의 매장량이 약 4만 톤으로 추정되었다.4) 여주광산에서 일한 적이 있는 최병두에 의하면 광산 규모는 약 50~70명 정도였다고 하며, 이 광산들의 존재로 당시 금사면의 재정은 다른 지역의 면보다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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