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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지방자치제 실시와 여주군 읍면의회

정부수립 이후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의해 지방자치제가 법제화되었지만 정치적·사회적 불안정과 한국전쟁의 발발 등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방자치를 고의적으로 미루어오던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의 와중에 피난 수도 부산에서 1952년 2월 6일 대통령령 제605호로 최초의 시·읍·면 의원선거를 4월 25일 실시하겠다고 공표하였다. 1949년에 제정·공포된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뚜렷한 명분 없이 미룬 것이 대중적 기반이 없는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 때문이었다면, 한국전쟁 중 지방자치제를 강행하게 된 것 또한 이승만의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즉 민중의 지지가 낮았던 이승만은 같은 단정세력인 한민당에 의해 집권연장을 위한 재선이 위협을 받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각급 지방의회를 ‘민의의 대변자’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갑자기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를 4월 25일에 실시한다고 공표하였던 것이다.1)

정부수립 후 처음 실시되는 지방자치제는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정치적 의도에서 활용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법 개정을 통해 정권연장의 도구로 전락되었다. 특히 1958년의 지방자치법 제4차 개정안은 시·읍·면 의회나 동리 주민에 의해 선출하던 방식을 폐지하고 임명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지방자치를 행정을 위한 중앙행정기구 차원의 문제로 전락시키는 등 지방자치제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2)

1950년대는 불완전하지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으며, 여주군에서는 읍면 단위에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다. 여주군의 읍면의회 의원선거는 1952년 4월 25일과 1956년 8월 8일, 1960년 4·19 민중항쟁 직후인 12월 19일 등 세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1952년에 실시된 제1회 읍면의회 의원선거는 여주읍에 15명, 9개면 중에서 가남면, 대신면, 북내면 등이 13명, 점동면, 능서면, 금사면 등이 12명, 흥천면, 개군면, 강천면 등이 11명씩으로 총 123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여주지역의 지방자치사상 최초 4년 임기의 읍면의회를 발족시키고 당일자로 읍면의회에서 읍면장 10명을 간선으로 선출하였다.3)

현재 자료의 미비로 당시 여주군내 읍·면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읍면의원 123명의 소속정당별 분포를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전국적 수치나 경기도 수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체적인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전국적으로 당선된 읍의원의 소속정당별 분포를 보면 무소속이 38.5%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24.5%의 자유당, 20.5%의 대한청년단, 그리고 13.9%의 국민회순이었다. 경기도의 경우 정당별 분포를 보면 무소속이 37.1%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35.2%의 대한청년단, 13.3%인 국민회, 7.6%인 자유당, 1.9%의 민주국민당(한민당의 후신) 등의 순이었다. 전국에서 당선된 면의원들의 소속정당별 분포를 살펴보면 42.8%로 무소속이 가장 많았으며, 25.3%로 집권당인 자유당, 16%인 대한청년단과 15.2%인 국민회 등의 순이었다. 경기도의 경우, 49.1%로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30.6%인 대한청년단, 13.2%인 국민회, 5.4%인 자유당, 0.3%인 민주국민당 등의 순이었다.4)

여주지역의 경우, 2차 미소공위 실패와 남한 단선·단정노선에 입각한 5·10 선거과정을 거치며 남로당 등 좌익세력이 거세된 후 독촉국민회나 대한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던 실정이므로 경기도의 경우와 같이 대한청년단과 국민회의 소속정당을 가진 인사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소속의 경우도 대체로 한민당의 후신인 국민당 계열이거나 한청·국민회를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6년 제2회 읍·면의회 의원선거는 선출된 의원수에서 1952년 선거와 약간 차이를 보였다. 즉 여주읍에서 13명, 가남면, 대신면, 북내면 등 3개 면에서 12명, 그 외 점동면, 능서면, 흥천면, 금사면, 개군면, 강천면 등 6개 면은 각각 11명씩으로 도합 115명이 선출되어 대체로 각 면당 의원수가 1~2명 정도 감소한 결과를 보였다. 그리고 당일 유권자 사상 처음으로 읍면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여 읍면별로 모두 10명의 직선 읍면장이 선출되었다.

제2회 읍면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읍면의원 115명의 소속정당별 분포를 전국적 수치나 경기도 수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체적인 윤각을 살펴보면 1952년도와 달리 자유당 소속 의원들이 많아지고 무소속의 비율이 적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읍의원의 전국적인 소속정당의 분포를 보면 자유당이 51.5%로 가장 많았고, 무소속은 39.5%, 민주국민당은 5.7%, 국민회는 2.8% 등이었다. 경기도내의 경우는 집권당인 자유당보다도 무소속이 더 많은 50%가 당선되었고, 자유당이 35.6%, 민주국민당이 8.7%, 국민회 4.8% 등이었다. 면의원의 전국적인 소속정당의 분포는 자유당소속이 69.6%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무소속이 27.6%, 민주국민당과 국민회는 각각 1.5%와 1%를 차지했다. 경기도내의 경우 자유당 소속이 73.2%, 무소속이 23.4%로 전국에 비해 자유당 세가 비교적 강했음을 알 수 있다.5)

이를 통해 볼 때 1952년 선거에서 읍면의원의 당선자 중 집권당인 자유당 소속보다 무소속과 한민당계의 비율이 많았으나 1956년 선거에서는 무소속과 국민당의 비율보다 자유당 소속의 비율이 배 이상으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경기도의 경우가 전국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여주지역 읍면의원의 경우 경기도의 수치에 근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주지역은 경기도내에서도 우익세력이 강한 곳이었고, 또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들 세력이 이승만 정권의 여당인 자유당에 대부분 흡수되었으므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 읍면의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읍면의회의 선거가 처음 실시되었던 측면과 함께 지방자치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실시되어서 읍면의회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당시 읍면의회 의원들은 자신의 직무에 대한 이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중앙에서 파견된 인사들에 의해 여러 차례 이와 관련한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읍면의회의 회의시 참석이 저조하여 면사무소 직원이 읍면의원의 참석을 독려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는 당시 증언에 비추어볼 때 읍면의회의 활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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