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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5·10선거 출마 후보와 결과

5·10선거는 단정반대운동을 벌이면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좌파와 중도파세력을 비롯하여 우익세력인 김구·김규식 등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들이 반대하여 불참한 가운데 미군정의 지원 속에서 단정 추진세력인 이승만·한민당 계열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한편, 5·10선거는 유엔 한국위원회에서 파견한 35명의 감시원이 선거 감시에 나선 가운데, 남한 최초의 보통·평등선거로서 91.7%의 유권자 등록을 확보하고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한편, 5·10선거는 전국선거위윈회의 15명 위원 중 12명이 극우진영의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조직에 속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남한이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 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남조선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유엔 임시위원단 위원장인 시리아 대표 야심 머기의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강요와 불법이 곳곳에서 자행되면서 실시되었다.1) 또한 좌우대결 속에서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총선 결과의 가장 큰 특징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의 숫자보다 일제하 행정관료나 판사, 금융조합에 종사한 인물이 많았고, 적극 친일행위를 한 사람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미군정 관리나 민주의원, 입법의원 및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우익 성향의 인물들이었다.2)

여주지역에서 5·10선거는 중앙과 마찬가지로 남로당 등 좌파 등이 불참한 가운데 이승만·한민당을 지지하는 독촉국민회 여주지부와 대청이나 독청, 족청 등 여주지역 우익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여주지역의 총선은 대청과 독청 등 우익 청년단체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가 두드러진 선거였다. 선거에 참여한 후보로는 독청의 구종태 군단장과 대청의 원용한 군단장, 그리고 구종태 후보가 사퇴한 이후 여주 독청지단의 조직적 기반하에 출마한 한민당 계열의 조용택 등 3인이었다.3)

김윤선의 「여주소사」에 따르면 구종태 후보는 일제시기 설린상 출신의 은행가로서 조선은행, 호남은행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인이었다. 또한 조선은행 재직시 정구 선수로 전국에 이름을 날린 인물로서 일제 말기 조선도기회사의 지배인으로 경영에 참가하면서 여주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해방 후 창설된 독청 여주군지단의 단장으로서 무자비한 좌익타도의 선봉장으로 악명을 날린 인물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여주군민의 지지를 많이 잃었으며, 군청이나 경찰서 등 관공서와의 관계가 상당히 소원했다고 한다.

이 결과 그에 대항하기 위해 우익계열의 또 다른 후보로 대청 여주군단의 원용한 단장이 독촉국민회 여주지부를 비롯하여 여주중앙교회 등 감리교 계통의 적극적 지원과 대동청년단 단원이었던 김의준 법원장 및 정시윤 검찰지청장 등과 군수 이하 읍면의 행정조직의 지원 속에서 출마하였다. 원용한 후보는 여주 이천지역에서 오랫 동안 목회를 해온 목사로서 1943년 목사직에서 은퇴하였으며, 해방 후 여주지역에서 우익계의 원로로 초기에는 김구의 한독당 지부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1947년 후반 이승만의 단정노선이 본격화하자 이승만 노선에 입각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5·10총선을 맞아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청 소속으로 출마하였던 것이다.4)

두 후보가 대결하는 가운데, 결국 검찰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독청단원을 구속하는가 하면 묵은 비위사실을 들추어 추가기소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사퇴 압력에 시달린 구종태는 입후보를 취소하게 되었다. 그 후 같은 계열이면서 한민당의 조용택이 대리 입후보하게 되었다. 조용택 후보는 임정 외교부장과 한독당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 단독선거를 거부하면서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남북합작을 위해 김구와 함께 평양에 갔었던 조소앙의 일가로서, 이 시기에 구종태 단장으로부터 인계받은 독청 여주군지단의 조직적 기반을 갖고서 출마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민당원이었으나 당시 민중의 친일적 성향의 한민당 기피로 인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으로 보인다.5)

선거 결과 원용한 대청 후보가 2만 1,967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만 991표를 얻은 조용택 후보를 누르고 2년 임기의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에 개원하였는데, 그는 초대 국회에서 최고령자로서의 특권인 임시 국회의장을 수 분 동안 지냈다고 하며, 농지개혁법과 양곡매입에 관한 몇 차례의 발언을 통해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회 회기 중 벙어리 국회의원이란 관록을 유지한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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