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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5·10선거 전후 여주지역 정치세력의 동향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이후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한 여주지역의 정치세력은 크게 단독선거 반대운동을 통한 단정반대 세력과 단정추진 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단정반대 세력은 대체적으로 남로당 계열의 좌익세력과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중도세력인 민족자주연맹의 김구·김규식 계열로 볼 수 있다.

여주지역에서 이 시기 남로당 세력이 지하화하여 비합법적인 단정반대운동을 벌였던 상황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알기 힘들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기 이전인 1947년 5월에서 7월까지 여주지역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좌익계열의 인사들이 여주지역에 내려와서 이전 좌익계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다니는 바람에 우익들은 주춤하여 고개를 숙이고 좌익들은 어깨가 으쓱하여 날뛰기 시작했으며, 6월 서울에서 내려온 남로당 간부급인 권용활의 강연회에 2천여 명의 여주군민이 참석했다는 점과 7월 남로당 경기도책인 박형병이 여주지역을 다니며 남로당 선전선동에 주력하였다는 점을 볼 때에 이 시기 여주지역의 남로당 조직은 어느 정도 조직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로당의 외곽단체로서 1947년 6월 조직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이하 민애청)이 미군정의 좌익 총검거령으로 합법적인 활동이 봉쇄되는 가운데, 이 시기 남로당의 전술변화에 따라 맹원배가운동을 벌이면서 야산대를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여주지역에서 여주 민애청의 활동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1947년 중반 “왕성한 좌익계열의 활동에 의해 독청 여주군 지단의 간판마저 붙어 있을 날이 없었다.”는 김윤선의 회고를 볼 때 우익청년단체인 독청 여주군지단과 대등하게 맞섰던 여주 민애청 조직이 어느 정도 조직을 갖추고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주지역의 5·10선거시 대신면의 초현리 투표소에 능서면에 사는 ‘박모’라는 남로당 청년이 침입하여 선거를 방해하는 단선저지운동을 벌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여주 민애청은 지하화된 소규모의 조직으로 나름대로 비합법적인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주지역에서 단정추진세력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적극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주군지부와 대청, 독청, 족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을 들 수 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해방 직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기반으로 조직되어 이승만 세력의 주도하에 해방 직후 좌익세력이 장악하였던 대중적 기반을 빼앗음으로써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단체였다. 이 단체의 여주군지부에는 당시 지주, 자본가, 의사, 목사 등 여주지역 대부분의 우익계열 인사들이 가담하고 있었다.1)

한편, 이 시기 여주지역 우익계열의 청년단체 활동은 대청과 한민당계의 독청 여주군지단, 그리고 족청과 대한청년회 등이 대표적이다. 여주지역의 대청 단원은 원용한을 군단 대표로 하여 이철희, 이철상, 서은하, 임은규 등이 간부로 있었다. 그 외 여주지역 법조계의 김의준(당시 법원장), 정시윤(검찰지청장) 등도 대청에 가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초기 대체로 여주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바탕으로 우익계열인 김구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UN 임시위원단의 내한을 전후한 1948년 2월 27일 긴급 상무위원회에서 대청의 부단장 이성주가 “종래 김구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왔는데, 현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남북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선거할 것을 주장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이후 여주지역의 대표적 한독당원이었던 원용한을 비롯하여 여주지역 대청 단원의 대부분이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는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2)

5·10선거를 전후한 대청 여주군 지부의 활동은 독청 여주군지단과 맞겨룰 정도로 상당한 조직을 바탕으로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청은 5·10선거에 임하여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87명의 대의원을 입후보자로 내세우는 등 총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결과 12명이 당선되었다. 여주군 대청지부도 원용한을 후보로 총선에 참여하여 감리교 계통인 법원장 김의준과 검찰지청장 정시윤을 비롯하여 여주군수 및 산하 읍면에 이르기까지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청 여주군지단의 조직을 기반으로 한민당의 조용택 후보를 물리치고 초대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지역보다 대청의 여주군 지부는 조직적 기반의 확대와 왕성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5·10선거 직후 기존 우익계열의 청년단체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사실상 준군사조직인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을 때 대청의 여주군 지부 단원들도 한청으로 통합되었으며, 서은하 등이 주요 간부진으로 활동하는 등 여주군 한청지부의 주요한 세력으로 존재하였다.

5·10선거를 전후하여 이 시기 여주지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우익청년단체로, 일제시기 설린상 출신의 은행가로서 조선은행과 호남은행 등을 거친 대표적 금융인이자 조선도기회사의 지배인으로 활동했던 구종태를 단장으로 한 한민당계의 독청 여주군지단이 있었다. 독청 여주군지단은 부단장에 임의식과 이철상을 비롯하여 총무부장 박수만 조직부장 전종성, 선전부장 권장성, 훈련부장 권형원, 문교부장 황을성, 근로부장 곽화영, 후생부장 김윤선, 사업부장 송복길, 재정부장 이방우, 체육부장 이홍순, 운수부장 김한술, 정보부장 홍순우, 여청부장 나문환 등을 간부진으로 하는 여주지역에서 조직규모가 가장 큰 우익청년단체이다.3)

김윤선의 「여주소사」에 의하면 독청 여주군지단은 1947년 창설 이후 여주지역 좌익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선봉에 선 대표적인 청년단체로서 군단본부를 위시하여 각 읍면 이하 리동에 이르는 말단조직까지 계통적으로 짜여 회원이 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단원들은 일정한 단복까지 착용하여 일사불란한 명령체계 속에서 좌익세력에 대항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한민당의 단정노선을 적극 지지했던 독청 여주군지단도 단장 구종태가 5·10선거에 출마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청 여주군지단의 활동은 당시 대부분의 우익 청년단체가 그러했듯이 매우 폭력적이고 과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폭력성은 1947년 6월경 서울에서 내려온 좌익계 인물인 권용활의 연설회에서 난동을 부린 ‘권용활사건’에서 보듯 우익청년단체를 적극 지원했던 여주경찰서장도 말릴 정도로 심각했으며, 여주군내에서 ‘폭력단체’로 낙인이 찍혀서 군민뿐만 아니라 군청과 법원, 지청 등 관공서에서도 거리를 둘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 5·10선거에 독청 후보로 구종태 단장이 출마하였을 때 여주 검찰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독청단원들을 구속하기도 하였고, 이전의 비위사실을 들추어 추가기소를 당하면서 결국 입후보를 취소하게 되었다.4)

여주지역에서 또 하나의 청년단체로서 일정한 조직규모를 가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있었다. 족청 여주군단부는 단장 오덕섭(吳德燮)5)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주지역에서 족청의 조직적 세는 대청이나 독청에 비해 활동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당시 족청에는 우익진영의 우세가 분명해지면서 신변위협을 느낀 중도계열이나 좌익계열의 인물이 다소 참여했으며, 좌익탄압과 단정노선 등 5·10선거에 소극적인 입장을 가졌으므로 적극적으로 나선 다른 청년단체와 달리 지도급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별 활동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지주 출신으로서 일제시기 서울에서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등 영화사업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 여주지역 우익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오덕섭은 한청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그의 족청 조직을 가지고 초기부터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의 결과로 한청의 여주군단장이 될 수 있었다.7)

5·10선거 후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전후한 당시의 정세를 반영하여 대한청년회가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지지기반은 매우 취약하였다. 그것을 불완전하게나마 지탱해준 것은 지주 및 보수우익세력을 기반으로 한 친일 경력을 가진 한민당과 이승만을 추종하는 친미 지식인 및 농촌 지주층 중심의 독촉국민회, 그리고 해방 3년 동안 좌익탄압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던 준군사단체인 우익청년단체 등이었다. 그러나 국가형성의 동반자였던 한민당이 이승만의 각료 선임에 불만을 품어 양자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특히 정부수립 후 2개월 만인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여 전국 각지에서 좌익의 도전을 받는 상황에 직면한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걸쳐 잘 훈련되고 조직되어 있던 모든 우익 청년단체들을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우익청년단체들간의 암투가 치열해지고 다른 청년단체들도 계속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정권차원에서 각 청년단체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기 위해서 청년단체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고, 더 나아가 날이 갈수록 세가 커지는 족청에 대해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청년단체의 입장에서 좌익세력의 쇠잔으로 자신들의 공개적인 투쟁목표가 없어진 조건에서 생존의 근거를 찾지 못하는 상태를 해소하려는 바람이 청년단체 통합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12월 19일 대청과 독청, 그리고 대한민청 등 ‘피로 얼룩졌던’ 지난날의 우익청년단체들이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승만을 총재로, 단장에 신성모,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에 김두한을 선임한 대한청년단을 12월 19일에 창설하였다.8)

중앙에서 한청으로의 통합은 여주지역의 청년단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곧 여주지역에도 청년단체의 통합이 추진되어 이전 족청의 군단장이었던 오덕섭과 독청의 후생부장이었던 김윤선을 각각 군단장과 부단장으로 하고, 독청의 부단장인 홍순우와 사업부장인 송복길, 그리고 대청의 간부인 서은하를 비롯하여 김용규, 김상호, 노성래(훈련 배속장교), 임병철, 김재소 등 대청과 독청 등의 주요 간부를 중심으로 한청 여주군지단이 결성되었다. 한청 여주군지단은 각 읍면에도 조직을 두었으며, 단원 수는 약 800여 명이었다. 여주의 한청은 이전의 청년단체와 달리 중앙에서 하달되는 보조금을 받아서 간부들에게 수당 지급이 가능하였으며, 정기적으로 각 읍면 단원들의 합숙훈련을 하는 등 상당히 체계를 갖추어 활동하였다. 이는 이전시기 여주의 독청이 행했던 특유의 탈선과 만용에 유의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단원 각자의 자질 향상에 노력하였다.

한청은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어 정치·경제·군사 문제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문제가 부각될 때마다 담화나 결의문 발표, 그리고 궐기대회 등을 개최하여 이승만 정권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한 공식적인 의견을 밝혀 이승만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여주군의 한청도 중앙의 한청과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군청, 지청, 법원, 경찰서 등 여주지역의 기관장들과 상호 협력관계하에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면서 여주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에 참여하였다. 더 나아가 1950년 제2대 5·30총선에서 한청의 여주군 오덕섭 단장이 한청의 조직을 발판으로 출마하기도 하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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