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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한민당의 단정노선과 5·10선거

1946년 행정의 한인화(韓人化) 작업을 마친 미군정은 1947년 2월 5일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고, 2월 15일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모두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은 고문으로 앉혔다. 또한 미군정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약칭 미소공위)가 개최 중이던 6월 3일 남조선 과도정부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미소공위 결렬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모색하였다. 결국 1947년 7월 미소공위가 결렬로 끝나면서 미군정은 미국 본국과 긴밀하게 협의해나가며 단정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해갔다.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얻은 것은 이승만(李承晩) 세력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구상을 능란하게 펼쳐나갔다. 그는 미·소간의 냉전이 심화되고 미소공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무산될 것을 확신하였다.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한 후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명확히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단정론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의 일방적 폐기와 자신이 주도하는 정권수립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당시 중간파를 활용한 통합적 정계개편 및 과도정부 수립을 모색했던 미군정의 구상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으로 미·소 대결구도가 최종적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남한의 현실정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으로 남한 권력의 물리력을 장악함으로써 향후 정권장악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2차 미소공위시 잠시 공동위원회 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반탁’, 단정노선에 기본적으로 함께하였다. 한민당은 미군정과 밀착하여 군정청의 요직과 검찰, 그리고 경찰을 장악하여 중도 및 좌익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일체의 민족협동전선에 반대했던 한민당은 친일파 처단에는 시종일관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토지개혁에도 반대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결의안 채택에 따라 호주, 캐나다, 중국, 인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이 1948년 1월 7일 입국해 의장인 크리슈나 메논을 중심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라는 미국의 제안이 채택되고, 3월 1일 하지에 의해 5·10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남한 단선에 관한 포고가 발표되었다.1) 남한 단독선거 일정이 현실화되자 김구는 이미 2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 발표와 3월 12일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의 ‘7거두 공동성명’을 통해서 이전까지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던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에 대해 격렬히 비판을 가하였다.2)

단독선거에 대한 주요 정당들과 남한 민중들의 거센 선거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미군정 당국은 남한 단독선거에서 실질적인 대중 지지의 감소를 막으면서, 적극적인 선거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정보와 홍보담당 직원은 물론 국무성 외교 담당 예비역 장교까지 남한에 급파하였다. 또한 1948년 3월 미군정은 주요 지지기반인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의 반대에도 일정한 농민들의 지지를 통해 남로당의 단정반대운동에 균열을 가하고, 강력히 단선·단정의 추진을 위하여 당시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전 일본인 소유지인 귀속농지를 불하하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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