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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육정책과 문화행정

미군이 남한에 주둔한 후, 미군정은 군정정책과 ‘미국적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선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전반에 퍼진 급진적 분위기 속에서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군정 당국은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맹퇴치교육 등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고려하였다. 이를 위해 미군정 당국은 문교기구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성인교육계(成人敎育係)를 학무과 내에 설치했다. 이것이 1946년 1월에는 과(課)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2월 중앙행정기구의 개편에 따라 학무국이 문교부로 개편되면서 성인교육과는 국(局)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7월 10일 사회교육의 사무는 성인교육국(成人敎育局)과 교화국(敎化局)으로 나뉘어 취급되고 있었는데 이들 주무국(主務局)의 업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1)

  • 성인교육국-일반 계몽에 관한 사무, 국민 재교육 및 국민정신 교양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지도자 양성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자료 조사연구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협조단체 감독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제반 시설 및 지도·감독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지방사정 조사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보고 및 기타 성인교육에 관한 서적 발행에 관한 사항, 성인교육 연예에 관한 사항.
  • 교화국-명승·천연기념물 답사 및 보존에 관한 사항, 종교 및 유교(儒敎)에 관한 사항, 보물·고적 기타 문화재의 조사 및 보존에 관한 사항, 성균관·향교·유림단체에 관한 사항, 각종 개인 종교에 관한 사항, 서원 및 사우에 관한 사항, 박물관 및 도서관에 관한 사항, 청소년 지도에 관한 사항, 일반 및 단체 체육에 관한 사항, 일반 음악·극장·영화·무용 및 공예에 관한 사항, 미풍·민속진흥 및 생활개선에 관한 사항, 종교 및 사회교화 관계에 관한 사항, 미술 박람회에 관한 사항, 기타 교화에 관한 사항.

이상과 같이 분리되어오던 성인교육국과 교화국은 1948년 7월 양국(兩局)이 통합되어 사회교육국(社會敎育局)으로 개칭되었으며, 국내(局內)에는 성인교육과, 교도과, 문화시설과, 예술과, 체육과가 있어서 앞의 2과가 종전의 성인교육국에 속했던 업무를 담당하였고, 뒤의 3과가 교화국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2) 이러한 기구의 변천은 사회교육의 방향 내지 정책의 중점 방향과 관련하며 변한 것이었다. 즉, 해방 후 초기의 사회교육 방향이 성인교육을 중심으로 전개됨에 따라 기구 역시 성인교육계·과·국의 명칭으로 승격·변모하였으며, 사회교육의 대상과 내용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그 기구의 체계도 일원화되어갔던 것이다.

당시 성인교육의 중심과제는 문맹퇴치교육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정하에서는 국문강습소(國文講習所)가 전국적으로 설립되어 활발하게 움직였다. 국문강습소는 구·읍·면 주최, 리·동 주최, 국민학교 주최 등이 있었으며 강습 기간은 일정치 않았으나 평균 3개월 정도였다. 각 시·군에 성인교육사 남녀 1명씩을 배치하였으며 면(面)지도자, 리동(里洞)지도자를 양성하여 일선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표 4)를 살펴보면, 1946년도의 강습회수는 2,141회였으나, 다음해인 1947년도에는 3,416회로써 약 1.5배 증가하였으며, 수강생수도 1946년에 비해 11만 800명이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해방 당시 13세 이상 경기도 총인구 180만 7,259명 가운데 문맹자수가 125만 1,002명(69%)이었던 것이, 군정기간을 거치며 정부수립 당시에는 12세 이상 경기도 총인구 141만 2,484명 가운데 문맹자가 53만 7,626명(38%)으로 감소하였다.3)

국문강습소 외에 공민학교(公民學校)의 운영 역시 당시 성인교육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공민학교가 제도상 정규 교육기관으로서 인정된 것은 1946년 5월에 ‘공민학교 설치요령’이 제정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주로 학령을 초과한 미취학자를 대상으로 단기간 내에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으로서, 소년과(少年科), 성년과(成年科), 보수과(補修科)를 두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필요한 과만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 소년과는 13세 이상으로 국민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사람이 입학하도록 되어 있었고, 학과목으로는 공민, 국어, 국사, 지리, 산수, 이학, 음악, 체조, 가사, 재봉 등 당시의 국민학교와 동일한 과정을 이수하도록 하였다. 성년과는 국민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18세 이상된 사람이 입학할 수 있었으며 공민, 국어, 산수를 배우도록 되어 있었다. 보수과는 13세 이상된 국민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었으며, 후에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공민학교의 설립운영자는 시·읍·면 또는 동·리, 그리고 공장, 회사, 종교단체, 성인교육협회, 조선농회 등이었다.4) 당시 경기도 내 공민학교의 현황은 (표 5)와 같다.

한편, 이 시기의 기타 문화행정 측면에서는 우리 문화재를 재지정하고 새로운 문화재를 찾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어왔다. 일제는 식민통치 동안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을 문화재로 지정하여왔다. 즉, 그들의 식민사관에 기여하는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반면, 귀중한 사료가 될 문화재는 일본으로 불법 반출 또는 파괴하여 우리의 소중한 역사 유적을 말살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미군정기부터는 이를 민족적 입장에서 재정리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이 이루어졌다. 사계의 권위자가 중심이 되어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문화재 실태를 조사·파악하는 한편 이를 일일이 검토하여 재정리하거나 폐기하였다.5)

정부수립 당시 우리나라 지정 문화재의 총수는 715점이었는데, 이 가운데 남한에 소재한 것이 566점이었고, 북한에 소재한 것이 149점이었다. 남한의 566점 가운데 폐기 혹은 재지정의 결과, 지정 문화재는 1949년 현재 총 587점이었으며, 그중 국보가 367점, 고적이 105점, 고적 및 명승이 3점, 명승 및 천연기념물이 1점, 순(純)천연기념물이 111점이었다. 당시 경기도의 경우 40점의 문화재가 지정되었는데(표 5), 이 가운데 여주가 13개의 국보를 보유하여 경기도 최고의 문화유적지임을 과시하였다(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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