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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정책과 새교육운동

해방 후 미군정기의 교육정책에서는 교수용어(敎授用語)로 한국어의 사용, 일제 잔재인 황국사상의 조속한 불식, 민주교육이념의 보급을 위한 교원 재교육, 교육제도의 민주화와 교육시설의 확충, 문맹퇴치를 위한 성인교육 등을 강조하고 있었다.1) 즉, 일제하의 전체주의·식민주의 교육에서 민주적 교육체제로 전환하며, 교육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군정 교육정책의 기조 위에, 당시 교육계에서는 소위 ‘새교육운동’이라 불리는 아동교육운동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일제식 교육에 반대하고, 지식 중심의 획일주의 교육에 반발하면서, 인간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된 학습을 중시하는 생활중심·아동중심 교육”을 표방하고 있었다.2)

문헌상 새교육운동의 시작은 1946년 9월 12일 문교부가 남한의 교육자를 망라하여 ‘신교육연구협회(新敎育硏究協會)’를 창설하기로 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새 조선 건설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긴급을 요하는 새교육 실시의 만전을 기하기 위한 방도로서 문교부에서는 이번에 남조선 내의 교육자를 망라하여 신교육연구협회를 창설키로 되었다. 우선 중요한 행사로서 인천, 개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소재지에 강사를 파견하여 신교육의 취지와 의의를 부연시키는 한편 『새교육』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새로 조직될 교원조합 또는 교육자협회에 배부하리라 한다.3)

이 운동은 대부분 미국 유학파 출신이고, 기독교 신자이며, 보수우익의 정치성향을 보이고 있던 한국인 교육계 엘리트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은 미군정 교육정책 수행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당시 학무국(문교부) 한국인 차장 오천석(吳天錫) 등이 있었다. 오천석 같은 미국 유학파 출신 상층관료와 학무국 한국인 하급관료들이 관에서 주도하고,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교사 및 교육계 인사들이 민간 차원에서 호응하면서 일어난 교육운동이 바로 새교육운동이었던 것이다.4)

당시 새교육운동은 주로 초등교육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교육과정연구보다는 학습지도법을 개선하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첫째, 일본어로 의사소통하던 것을 중단하고 우리말을 모든 교육방법의 기반으로 삼을 것, 둘째, 선진적인 미국의 교육방법을 참고할 것 셋째, 암기·주입식의 교사중심 학습지도에서 아동의 개성과 경험을 토대로 한 단원중심학습, 아동 스스로가 상호간 협의할 수 있는 분단학습 등 민주적인 아동중심의 학습지도로 전환할 것 등이었다.5)

한편, 새교육운동은 종래의 전제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학교생활지도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자치적 영역을 확대하고 학생들의 활동을 학생 스스로가 협의·결정하게 하는 운동도 함께 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어린이 자치회 교육 및 기타 과외활동 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당시 한 특별활동모범학교 교장이었던 조석기(趙碩基)는 당시의 활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8·15의 새 아침을 맞이하자 우리 교육계는 혼란과 함께 커다란 전환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을 청산하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 찾기에 바빴다. 1946년 창영교(昌榮校)의 몇 사람의 교사와 몇 사람의 어린이들에 의해서 취미와 특기를 신장하는 몇 개의 Club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이것을 문교부 과외활동이니 또는 문화부 활동이니 하고 불렀다.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형태로서 그 실제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실천 속에서 이론을 얻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Club활동의 조직과 편제가 정식으로 갖추어졌다. 그리고 1947년 9월 1일 어린이 자치회를 조직하였고, 동년 10월 28, 29일에는 교육연구발표회를 개최하여 민주주의를 소개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한 어린이 자치회 운영을 보여주었다. 또한 1949년 4월에는 대한소년단의 산하단체로서 Boy Scout, Girl Scout의 조직을 보게 되었다.6)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학습지도법과 자치활동·과외활동 교육 등은 당시의 열악한 교육여건, 교사들의 이해와 경험 부족 등의 이유로 큰 효과를 얻지 못하고, 형식에만 치중하여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새교육운동에서 중요시한 상호학습식 교수법은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학급구조와 주입식 강의에 대한 교사들의 선호로 인해 시범수업에서나 활용되었을 뿐 실제로는 기존의 교수법과 교육관행이 학교교육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애국조회·각종 검사·권위주의적 학급운영구조·주훈(週訓) 등과 같이 일제말 전시동원체제기의 학교운영 기제와 매우 유사한 규율들이 주창하는 구호만 바뀐 채 그대로 존속했다. 일제하를 거치며 학생의 일상을 지배하던 파쇼적 규율이 학교와 교사, 학생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방식으로 내면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국신민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새교육운동가들조차도 파시즘적 성격이 내재된 이러한 규율을 용인하거나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일제말기의 학교교육이 식민주의 정책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데 비해, 미군정기의 이 ‘새로운’ 학교교육은 체제에 순응적인, 소위 ‘애국적 민주시민’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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