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미군정기의 정치... 미군정기의 교육... 미군정기 교육행...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미군정기 교육행정기구의 조직과 학교교육의 재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세계정책은 세계자본주의의 유지 및 재편성에 그 핵심이 있었다. 여기서 세계자본주의의 유지란 방어적인 차원의 정책으로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의 팽창과 제3세계 민족혁명의 발발을 저지하려는 것이고, 세계자본주의의 재편성이란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서 2차대전 이전에 존재했던 제국주의 세력들의 블록경제체제를 타파하고 미국이 자국산업의 우월한 경쟁력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지배하려는 것이다.1) 미군정은 이러한 세계재편전략에 부응하여 조선에 자본주의 질서를 확립하고 급진적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하며, 나아가 조선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미군정의 교육정책 역시 이러한 미국의 전후 세계정책·대한정책(對韓政策)의 연장선 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미국식 민주교육제도’를 남한에 이식하고 이러한 교육행정·교육이념을 통해 남한을 공산주의권에 대한 이념적·정서적 방벽으로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남한사회를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좀더 확고하고 자연스럽게 편입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2)

이를 위해 미군정의 학무당국(學務當局)은 우선, 해방 후 공백상태에 놓인 남한의 교육행정기구를 새로이 조직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시급한 교육 현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휴교 상태에 있는 학교의 문을 여는 일, 한국인 교육지도자들에게 교육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는 일, 학무국과 각 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을 얻는 일 등은 당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들이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군정 교육부문 담당관 락카드(E. L. Lockard) 대위는 한국인으로 구성되는 교육자문기구의 설치를 구상, 교육계 각 분야 10인을 선출하여 ‘조선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자문기관의 성격을 지녔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육의 모든 분야에 걸쳐 중요한 문제들을 심의·결정하였고, 각 도(道)의 교육책임자, 기관장과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었다. 학무국을 한국인 직원으로 재편성하는 일, 종래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던 각 도의 교육책임자와 전국의 많은 학교장 자리를 한국인으로 채우는 일과 같이 해방 직후 가장 긴급했던 교육인사를 담당했던 것이다.3)

교육계 전반에 걸친 당면 인사문제를 마친 후, 군정 당국은 좀더 장기적 전망에서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육내용 등에 관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수립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학무국은 1945년 11월 23일, 교육계와 학계의 권위자 100여 명을 초청하여 조선교육위원회를 확대·발전시킨 ‘조선교육심의회(The 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 Planning)’를 새로이 구성하였다. 교육심의회에는 10개의 분과위원회4)를 두어 각 분과별로 학무국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의제를 협의·결정케 하였고, 그 결과를 전체회의에 제출하여 최종 의결을 보게 하였다. 1946년 3월 7일의 전체회의를 끝으로 그 임무를 마치기까지 교육심의회는 분과협의회 총 105회, 전체회의 총 20회를 거치게 된다. 교육심의회는 미군정 교육정책의 기본틀을 형성한 기구로서, 그 핵심적인 성과는 홍익인간(弘益人間) 교육이념의 채택, 6-3-3-4 기간학제 및 1년 2학기제의 수립, 의무교육제의 계획 등이었다.5)

미군정 학무당국은 교육인사·조직·체계 등을 이처럼 정리하는 한편, 여름방학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을 소집하여 학교교육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17일 일반명령 제 94호를 통해 모든 공립초등학교는 9월 24일부터 수업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사립초등학교는 개교 전에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9월 28일에는 각 도에 통첩을 보내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서도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끔 지시하였다. 이때, 수업은 우리말로 진행되도록 하였으며, 특히 산수·과학과 같은 교과 외에는 일본 교과서를 사용치 않도록 지시하였다.6)

당시 경기도의 각급 학교현황은 (표 1)과 같다. 국민학교의 수가 395개, 중학교의 수가 56개였으며, 학생수는 국민학교가 약 27만 명, 중학교가 약 3만 8,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기 이전이라 오늘날의 경기도에 해당되는 지역만으로 한정하여 본다면 실제 학교수와 학생수는 이보다 훨씬 적은 수였을 것이다. 이 가운데 여주 지역의 각급 학교현황만을 따로 떼어내 살펴보면 두 번째 표와 같다. 여주국민학교를 포함, 총 18개 국민학교와 여주중학교, 여주자영농업고등학교 등 2개의 중고등학교가 학교교육을 재개하였다. 해방 후 높아진 향학열과 부모들의 높아진 교육열을 배경으로 교육인구가 급증하자, 여주지역에서는 군정기간에만도 강천국민학교 대둔분교와 여주중학교 등 2개 학교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급증하는 교육 수요에 비해 이를 충족시킬 교원의 수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7) 해방당시까지 우리의 교육은 일본인에 의하여 상당부분 이루어져 왔는데, 해방과 더불어 6,849명에 달하는 일본인 교원이 일시에 물러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제시기 교육계에 있던 한국인들은 거의가 말단직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경우만 하더라도 1개 군(郡)에 한국인 교장이 1~2명을 넘지 못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서나 교육행정직에서는 더욱 심했다. 당시 락카드 대위는 이러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학무국을 재조직하고 유능한 한국인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학무국에 남아 있었던 한국인 교원은 주로 말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그들은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고 있었다. 각급 학교의 모든 중요한 자리가 일제하에서 일인(日人)에게 점령되었던 것인데, 군정과 더불어 그것을 모두 한국인으로 채워야 했기 때문에 한국인 교육자는 매우 부족하였다.8)

결국 당시 국민학교 교원의 수급은, 일제말에 교편을 잡고 있던 소수의 교원을 주축으로 하여 그 지역 내에서 학생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으로 학교 공석을 채우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절차에 있어서는 대개의 경우, 학교장이 선채용 후인준(先採用後認准)의 형태로 교사수급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중등학교 이상의 경우는 미군정의 지시에 근거하여 군정청 경기도 학무과 교원채용규정에 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중등학교 교원 희망자는 교원채용희망서에 희망학교, 희망담당교과를 상세히 기록하여 이력서와 소정의 필요한 증명서를 첨부하여 경기도 학무과에 제출할 것.
  2. 전문학교 교수 희망자는 전문학교 교장에게, 대학 교수 희망자는 각 학부장에게 같은 수속을 하여 지원할 것.9)

이렇게 교원채용규정을 대폭 완화했어도 원래 중등 이상의 학력 소지자부터가 부족한 상태여서 이 조치는 일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조치에 따라 초등학교 교원이 중학교로, 중학교 교원이 대학기관으로 대거 진출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다시 경기도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여 일제하 4·5년제 중학교 또는 3년제 중학교 졸업 정도의 준교사(準敎師) 채용제를 실시하여 교원 부족을 완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처럼 임시 조치에 따른 교사의 양적 수급에만 급급하다 보니 한편에선 교원의 질적인 문제가 새롭게 야기되고 있었다. 결국 군정 말 1948년 5월 10일 문교부는 행정조치로 ‘초중등교사 자격검정규정’을 정해, 국민학교 교원은 일제 때 중학교 3년 이상의 학력 소지자를 준교사로 채용하게 하고, 중학교 교원은 초급대학 또는 중등 정도의 대학에서 최소한도의 전문적 교육학 과목을 포함한 초급대학 소정 과정을 마친 자에 한하여, 고등학교 교사는 4년제 대학 소정 과정을 마치는 동시에 최소한도의 전문적 교육학 과목을 이수한 자에 한하여 각각 정교사 자격을 부여하게 했다.

이상과 같은 교원수급 노력의 결과, 1945년 해방 당시의 경기도내 교원 총수 3,950명이 1948년 정부수립 당시에는 70% 가량 증가한 6,760명으로 늘어났다(표 참고). 당시 경기도내에 설치되어 있던 교원양성기관으로는 초등교원양성기관으로 개성사범학교10)와 그 부설 초등교원양성소가 있었으며, 중등교원양성기관으로 1947년 10월 1일 수원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부설했던 임시과학중등교원양성소가 있었다. 이들 기관은 당시의 이 같은 교원 증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