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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과 생필품의 수급정책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미곡의 자유시장에 관한 일반고시’ 제1호를 발표하여 배급제를 폐지하고 각 농가가 미곡을 자유로이 판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뒤이어 10월 20일에는 일제시기의 각종 통제기구를 폐지하고 자유경제 원칙을 부활시키겠다고 발표하고, 25일에는 통제를 해제하고 물품의 자유 판매를 허가하였다.1)

이는 미국인들이 일제가 실시한 통제경제가 시장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곧이어 식량과 생필품 통제가 다시 실시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이 미곡자유화의 진정한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자유화정책이 실시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흡한 통제를 하기보다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극심한 식량과 물품난을 덜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미군정이 실시되기 이전 식량정책을 담당하고 있던 건국준비위원회의 식량관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식량문제의 해결이 치안 및 질서의 유지에 매우 긴요하다고 보고 산하에 양정부(糧政部)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두어 식량의 수집과 운송·분배 및 모리배의 감시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미군정이 자유화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는 식량이 시장에 유출되거나 모리배가 사재기를 하는 현상이 없었다.2) 그러나 자유화 조치가 가져올 수도 있는 모리배의 준동, 미가 폭등 등의 사회적 혼란을 감수하면서도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식량관리 프로그램을 부정하였다.3) 좌파세력에게 식량에 대한 운영권을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일제의 통제경제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생산한 곡식을 마음대로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점차 건국준비위원회의 식량관리 프로그램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일단은 미군정의 의도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오래 방치할 수는 없었다. 미곡자유화 조치는 미가의 폭등으로 이어졌고, 도시민은 식량을 구할 수 없어 아우성이었다. 따라서 도시민에 대한 배급미가 절실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식량과 생필품 통제로 정책을 전환하고 식량공출을 단행하였다. 목표량은 총수확 예상고의 30%를 수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공출은 원활하지 못하였고, 미군정은 중앙식량행정처, 조선생활품영단, 신한공사, 조선농회, 금융조합연합회와 각 시도의 행정기관을 총동원하여 식량공출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식량공출에 호응하는 농민들에게는 생활필수품을 보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경기도 상무부에서는 1946년 6월초 제1회 배급을 하기로 결정하고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이하 금련) 경기도지부와 각군 농회에 배급을 대행시켰다. 금련 경기도지부는 경성·인천·개성·고양·양주·용인·안성·평택·수원·시흥·부천을, 농회에서는 광주·포천·가평·양평·여주·이천·김포·강화·파수·장단·개풍·웅진·연안을 각각 담당하여 고무신·빨랫비누·세숫비누·성냥·광목·본견·교직·인견·농기구를 배급하였다.4)

그러나 물자가 태부족한 상태에서 생활필수품의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농민들은 높은 시장가격으로 생활필수품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공출에 대한 대금도 자유시장 가격의 30%에 불과한 정부수매가격으로 지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공출은 목표량의 80%를 웃돌았다. 식량공출이 경제를 안정시키고, 물가 앙등(仰騰)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인식하였던 미군정은 행정력뿐만 아니라 경찰력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특히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의 경우 식량공출에 호응하지 않으면 소작권을 박탈하였기 때문에 식량공출을 거부할 수 없었다. 미군정에 의한 식량수집정책은 결국 행정적, 재정적 수단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 아니라 물리력에 의해서 강행된 것이었다.5)

농민들은 공출에 대한 대가와 생활필수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현실에서 자유시장에 나온 생활필수품을 고가로 구입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였다. 또한 식량공출과는 별도로 생산물의 1/3을 소작료로 납부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공출은 일면 지주제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식량공출을 하면서 소작료를 별도로 지주에게 내지 말고 국가기관에 납부하도록 하였다.6) 미군정은 농민이 소작료와 공출액을 함께 납부하면 지주에게 다시 소작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주와 소작인을 매개하였다. 따라서 일제시기 이래의 관행이었던 병작반수(竝作半收), 즉 50%의 고율(高率) 소작료는 폐지되고 농지개혁이 단행되기 이전까지 소작료 3·1제가 지켜지게 되었다. 공출로 인한 농가 경제의 불안정, 지주제의 약화라는 양면적인 성격을 띤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은 농민들의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후 1950년 2월 양곡관리법이 공포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생활필수품은 수급통제와 가격통제로 추진되었다. 수급통제는 귀속기업체에, 가격통제는 생필품의 전체에 적용되었다.7) 우선 수급통제를 살펴보면 1946년 3월 5일 ‘통제품과 국내 배급 계획’이 발표됨으로써 경기도에 소재한 귀속기업체에서 생산되는 면포·신발·양말·성냥·세숫비누·빨래비누·지류·견직물·피혁의 9종 생필품에 대한 배급 통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은 경기도지역에 한정되었고, 주요 생필품에 대한 전국 규모의 수급 통제는 1946년 5월 28일 ‘경제통제령’이 공포되고, 경제통제를 담당할 기관을 정비한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중앙행정기관으로 중앙경제위원회, 조선경제자문위원회, 중앙물가행정처, 중앙식량행정처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량배급회사(식량영단), 조선주요물자통제회사, 조선석유배급회사 등 조선총독부의 경제통제기관들을 신한공사, 한국생필품회사, 물자통제회사, 석유배급기구로 재정비하였다. 기관들을 재정비한 후 미군정의 중앙경제위원회는 1946년 9월 14일 ‘통제품의 국가배급’을 공포하였다. 통제의 대상은 군정청의 관리하에서 보유, 보관, 또는 생산된 모든 중요 물품과 군정청으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개인업자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이었다.

상무부는 1947년 3월까지 위의 9개 종목과 농구(農具), 시멘트, 모직물, 마직물, 제복, 작업복, 내의류, 전구, 양정(洋釘), 동물성유(動物性油), 자동차, 자동차 타이어와 튜브, 주정(酒精), 맥주, 코크스 등의 총 23개 품목을 통제품으로 선정하였다. 미군정 상무부에서는 통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부터 매월 생산보고를 받고 그 생산량을 각 도에 할당하고 각 도에서는 할당량을 다시 각 군·면·리로 배급하였다. 1946년 7월 상무부는 통제물자의 배급 대행 기관으로 금련8)을 지정하여 6개 종목의 배급을 대행하도록 하였고, 농구(農具)는 조선농회, 제지와 종이제품은 조선양지배급주식회사, 목재는 조선목재주식회사, 시멘트는 물자운영조합연합회9)가 담당하도록 하였다가 다시 1948년 초 식량수집 보상용 물자는 금련이 맡았고, 일반 민수용 물자는 서울에선 금련이, 도 이하는 물련이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체계를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련을 제외하고는 배급실적이 저조하여 통제 물자를 제조하는 공장 생산고의 40%만이 배급되었다. 그 원인으로 대행기관들은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고, 배급권이 행정관청에 있어서 행정적 지체가 발생하며, 배급과정이 복잡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원료의 부족이었다. 게다가 배급을 위해 확보된 통제 생필품은 농민에게 우선적으로 배정한다고 하였지만 50%가 업무용, 24%가 식량 수집용, 보상물자 19%가 구제용, 후생물자 7%가 일반용으로 할당되어 민간인에게는 30% 가량만 배급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필품에 대한 국민들의 수요는 암시장에서 충족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가격 통제는 1946년 6월 생필품의 최고가격이 설정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공장가는 생산가에 10~15%의 이윤을 더하여 결정되었고, 소매가는 공장가보다 15~30% 높게 책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매가는 생필품의 시장가격에 비교하면 25~50% 정도의 낮은 수준이었다. 생필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원료에 대한 가격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료가격이 폭등하면서 최고가격이 생산비를 하회(下回)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통제상품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부정이 횡행하며, 생산량이 현저히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미군정으로부터 원료를 받아 생산되는 생필품의 경우, 정부의 통제대상이 되므로 생산업자들은 통제를 피하여 원료 소유자와 직접 계약을 맺고 불법적으로 생산을 하기 일쑤였다. 여러 통제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을 공급할 수 없자, 미군정은 생필품 공급을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도입된 물자는 정부 각 부처 및 운영기관에 할당되었고, 각 부처는 배급대행 기관을 지정하여 민간 소비물자를 민간에 배급하는 한편, 원료를 귀속기업체에 공급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생필품의 원활한 수급을 도모했다.

1946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생필품 통제정책은 자유매매의 폐해를 제거하고 제한적으로 생산되는 물자를 적정하게 배급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그러나 원료부족과 배급행정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성과가 부진하자 미군정은 원조물자로 그 부족분을 채워갔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 역시 일부 물자의 통제정책을 계승하였으나 동일한 문제만 노출시켰고, 1950년대 점차 국가에 의한 통제는 자본가 중심의 시장으로 그 역할을 넘겨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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