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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재산의 처리와 운영

미국은 남한에 진주하면서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美軍政)뿐”이라고 공포하였다. 미군정의 실시였다. 미군정이 점령정책을 실시하면서 제일 먼저 남한지역에 취한 경제정책의 방침은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하에서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방침의 일환으로 남한점령군 사령관 하지(J. R. Hardge) 중장은 1945년 9월 11일의 시정 방침에서 조선이 독립되면 조선 내의 모든 재산은 조선인의 소유가 된다고 하여 일제시기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재산에 대한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처음에는 일본인 재산에 대한 한국인의 거래를 인정하였으나, 1945년 12월 6일 남한 내 모든 일본인 소유의 공사(公私) 재산을 미군정이 접수한다는 법령 제33호를 공포하고 일본 기관이나 단체, 조합의 재산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1)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적산(敵産)은 이제 미군정에 귀속되어 귀속재산(歸屬財産)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여주군의 경우 ‘여주제와공장(驪州製瓦工場)’과 ‘조선도기주식회사(朝鮮陶器株式會社)’가 귀속기업체로 분류되어 경기도의 관리를 받았다. 접수된 재산의 범위는 광범위하였다.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조직되었던 모든 주식회사의 재산은 주식에 일본인 소유주가 있으면 모두 귀속재산으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합자회사의 경우 한국인 주식의 소유권은 전면 부정되었다.

한국의 자본가와 주주(株主)들은 이러한 조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 측은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 중에는 한국인이 주주로 참가하여 합법적인 경영을 해온 기업, 한국인이 ‘건실하게’ 운영해오다 전쟁 수행을 위해 일제가 차압한 기업 등 한국 내 본점을 둔 법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이를 돌려달라고 미군정에 호소하였다. 이들은 미국에까지 임원을 파견하여 미국무부에 진정서를 올렸다.2) 미군정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국에 본점을 둔 모든 법인을 적산의 범주에서 분리하고 독자 경영을 인정하였으며, 적산회사는 그 회사 속의 일본인 주식만을 귀속주로 취급하였다.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점령지역에서 사유재산권을 존중한다는 방침을 취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례적으로 일본인의 사유재산권을 부정하였다. 미군정의 법령 제33호에서는 구(舊) 일본인 재산을 보존, 유지하고 그 재산의 가치와 효율성에 손상을 주는 행위를 막는다는 취지라고 설명하였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한국경제를 분리시키는 한편, 전국적으로 강력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과 소작인의 일본인 소유농지 접수운동, 그를 주도해가는 좌파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11일 미국이 진주하기 전의 공백기는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가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고, 일본인이 물러난 일본인 소유의 회사와 토지에서는 한국인들이 회사와 토지를 접수하고 자주적인 운영을 하기 시작하였다.4) 이른바 ‘자주관리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직접 접수하여 자치위원회를 구성한 곳, 한국인 임원을 추대하여 경영을 맡긴 곳 등 자주관리운동의 수위는 다양하였으나 미군정은 이를 위험한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와 인민위원회 또한 경영자대표, 노동자대표가 공동으로 기업을 관리하자고 주장하면서 자주관리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이는 한국을 사유재산권에 기반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만들어가려는 미국의 의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적산을 미군정에 귀속시킨 뒤 일방적으로 관리인을 임명하여 자주관리운동을 무력화시키고 자본가 본위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6년 3월과 4월에 군정청과 각 도에 재산관리처(이하 관재처)가 만들어지면서 귀속재산에 대한 미군정의 행정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군정청(軍政廳)과 각 도에 재산관리관을 군·면·읍에는 관재처장을 임명하여 귀속재산 관련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관재처가 모든 귀속재산을 직접 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속재산 중 동산은 물자통제회사, 농지는 신한공사(新韓公社), 임야는 농무부 임업국, 광업·공업·상업 관련 기업체는 상무부, 은행과 보험회사는 재무부, 철도와 선박은 운수부에서 각각 관리하였다.

1946년 상반기가 되면 거의 모든 기업체에 관리인이 파견되었다. 여주제와공장과 조선도기주식회사에도 각각 권봉수와 최종선이 관리인으로 지명되었다. 관리인은 국영기업체의 공무원과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보증금을 납부한다든지, 이익금의 일부를 취득할 수 있다든지, 자기자본을 투하한다든지, 추후 매각과정에서 우선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 기업체를 소유한 자본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5) 관리인의 출신 배경은 일제시기 그 회사의 직원이나 주주, 관련 상인, 상공업자, 기술자, 미군정 관리, 일제시기 관리 등이었다.6) 일제시기 이래의 자본가들은 다양한 압력단체를 구성하여 관리인의 지위를 획득하였다.7) 경기도의 경우 1946년 6월부터 민간유력단체(상공회의소, 조선금융단 등)의 대표와 군정청 재산관리관으로 구성된 경기도재산관리이사회가 조직되어 귀속기업체의 운영과 처분 문제를 다루었다.8) 일제시기 자본가층의 계승과 확대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인제도는 관리인제도와 임대차제도, 중역(이사회)제도로 다변화되었다. 한국에 본점을 둔 법인을 적산의 범주에서 분리하고 일본인 소유 주식 또는 지분만을 미군정 소유로 한다는 1947년 12월 6일의 관재령 제10호에 의해 귀속기업체는 임대기업체와 일반관리기업체, 중역제실시기업체로 분류되었다. 분류의 원칙은 소규모 사업체는 임대, 대규모사업체는 관리, 한국인 지분이 있는 경우는 중역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임대기업체는 정부에 일정한 임대 수수료만을 납부하고 기업체 운영의 전권을 가졌기 때문에 거의 사기업화된 경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초까지 귀속기업체는 관리되기만 하고 거의 매각되지 않았다. 한국민의 합의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미국의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 경제의 이질화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의기관인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남한지역에 자본주의 질서가 뿌리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귀속재산의 불하(拂下)가 바로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불하된 재산은 총 564건에 13억 5,840만 원, 불하된 기업체는 105건에 8억 4,400만 원이었는데 불하된 기업체는 주로 100만 원 이하의 소규모 업체들이었으며, 1948년 1월부터 매각되기 시작하여 4월 이후에 집중적으로 매각되었다.

매각 대상과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관리인이나 임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관리인이 인수하지 않을 경우 최고가격 입찰자에게 불하하며, 두 번 이상 유찰될 경우에는 수의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귀속재산 구매자는 매각 대금의 최소 20%를 일시불로 납부하고 잔액을 연 7푼의 이자로 10년간 분할 상환한다.9) 이로써 관리인과 임대권자에게 장기(長期) 연부(年賦)의 저렴한 가격으로 귀속재산을 이전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비록 소규모 기업체를 중심으로 한 불하였지만 미국은 귀속기업체 매각을 통해 사적 자본가 계급을 창출하는 선례를 남기고자 하였다. 귀속재산의 불하, 사유화야말로 당시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국유화에 반대하여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조성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었기 때문이다.10) 여주제와공장과 조선도기주식회사를 비롯하여 1948년 말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 이전된 귀속기업체는 전국 기업체 총수의 21.6%에 불과했지만 종업원수는 48.3%, 공산액은 35%를 차지하였다.

이는 귀속기업체에 대규모 사업장이 많아서 한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크지만 생산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관리권 및 운영권의 혼선과 관리 부실, 원자재 및 자금의 부족, 생산 통제가 귀속기업체의 생산성을 가로막는 요소였고,11) 이는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한편 귀속재산으로 분류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와 조선식산은행 등 총독부 관할 기관의 소유 농지와 구 일본인의 소유 농지로 구분된다. 우선 동척을 접수한 미군정은 1945년 12월부터 소작농과 계약을 맺었으며, 동척의 인력과 기구를 그대로 활용하여 1946년 2월 신한공사를 설립하고 총독부 관할 기관의 소유 농지와 일본인 소유 농지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남한 농지의 15.7%를 관장하는 남한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12) 여주에서는 신한공사의 토지 회수 과정을 거쳐 카이겐(海原伊九郞)과 식산주식회사, 영보합명회사(永保合名會社) 등이 소유하였던 토지가 신한공사 산하로 편입되었다.13)

해방 후 동척은 다른 일본인 재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직원들끼리 동척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신한공사 설립과 토지 회수는 이러한 자치적인 운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일본인 소유 농지를 점유한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었다. 신한공사는 이들을 불법침입자로 규정하고 군경(軍警)에 도움을 요청하여 축출하였다.14)

서울의 신한공사 본부는 미국인 총재하에 군정청 농무부와 중앙식량행정처, 재무부, 조선농회, 조선은행, 중앙경제위원회 및 신한공사 사장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두어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정책과 신한공사의 운영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신한공사의 각 지점은 서울에 있는 본부의 농림부로부터 업무 지침을 지시받았다. 신한공사는 1946년 현재 경성, 대구, 대전, 목포, 이리, 부산의 6개 주요 지점에 의해 통제를 받는 144개의 농장사무소를 갖고 있었고15) 여주지역은 경성지점 여주농장에서 관리하였다.

신한공사의 주업무는 소작인과의 소작 계약과 소작료(총생산물의 1/3) 징수 및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을 원활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제시기의 식량공출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식량공출이 쉽지는 않았지만 신한공사가 소작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곡물은 모든 지방에서 미군정의 수집을 선도하였다. 미군정이 신한공사로 귀속농지를 집중시킨 이유도 바로 식량공출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16)

(표 3)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주농장이 포함되어 있는 신한공사 경성지점은 타지점에 비해서 점유한 호수(戶數)와 인구비율, 1정보(町步)당 미곡(米穀) 생산량은 적었지만 1호당 경지면적이 넓어서 수확이 많았기 때문에 매년 미곡수집 할당량을 달성, 혹은 초과 달성하여 식량수집 정책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6년 2월부터 미군정 경제팀과 신한공사의 관리들은 모든 귀속농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농지개혁법안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적어도 1947년 봄에는 토지매각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북한은 이미 1946년 3월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하였고, 이의 영향을 받아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가 급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토지분배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좌파의 영향력에서 농민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농민의 토지소유 욕구를 해소하며, 지주들을 안정적인 자본가로 육성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미군정의 경제팀과 신한공사의 관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입법위원)의 산업노농위원회 대표들은 논의를 거쳐 산업노농위원회의 이름으로 1947년 12월 입법의원에 농지개혁에 대한 법률안을 제출하였다. 북한과는 달리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안이었다.

당시 좌파는 무상몰수·무상분배, 중간파는 무상몰수·유상분배, 우파는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산업노농위원회 대표들은 중간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농지개혁안을 결정하기에 이른다.17) 무상몰수·무상분배는 사회주의 분배 시스템이라서 미군정이 지배하는 남한에서는 용인될 수 없었고, 무상몰수·유상분배는 농민과 지주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이상적이었으나 국가의 재정이 태부족한 상태에서 현실적이지 못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입법의원 내 지주세력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였다.

미군정은 입법의원에서 농지개혁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국이 아닌 한국인 자신의 손으로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추진시키고자 하였으나, 이것이 무산되자 1948년 3월 중앙토지행정처를 설치하고 귀속농지의 불하사업에 착수하였다. 중앙토지행정처는 4월 8일부터 귀속농지를 분배하기 시작하였다. 분배 조건은 각 농가당 2정보 이하의 농지를 분배하되 현재의 소작인에게 우선권을 주며, 평년작의 300%를 매년 20%씩 15년간에 걸쳐 현물로 납부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동년 8월 31일까지 85.9%의 귀속농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분배된 귀속농지는 1945년 말 당시 남한 전체 경지 면적의 11.6%, 소작지의 16.7%에 불과했으나, 이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입법의원에서는 무산되었으나 이미 귀속농지가 불하됨으로써 정부수립 후 농지개혁의 실시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입법의원에서 한국인에 의해 제시되었던 농지개혁안의 원칙이 귀속농지 불하에서 관철됨으로써 한국인의 반발을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셋째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함으로써 좌파의 영향력하에 있던 농민을 체제 내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미군정은 귀속기업체 중 소규모 기업체와 귀속농지의 불하를 통해 남한에 자본주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이는 남한 내의 정치적 의미 외에도 남북한 지역이 각각 체제적으로도 이질화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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