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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단정반대운동과 여주지역의 동향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은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마지막 기회였던 제2차 미소공위가 정돈상태로 들어감에 따라 본격화하였다. 결국 미소공위의 결렬은 연초부터 진행된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이 그만큼 어려워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총선거를 둘러싸고 남한 내부에서는 남한의 단독선거 반대, 남북 정치회담을 주장하는 통일 운동세력과 즉각 총선을 주장하는 단정추진 운동세력이 대립하였다. ‘UN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전후해 단정수립을 둘러싼 그 추진세력과 단정을 반대하는 통일 운동세력의 분립이 분명해졌다. 남로당은 1948년에 들어와 단선·단정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다.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2·7파업이었다.

이승만 세력은 UN 한국임시위원단 입국 전에 조기총선을 실시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 임시정부가 UN 한국임시위원단과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민당 역시 조기 단선(單選)과 단정수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반면 김구,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점차 반단정(反單政), 남북협상으로 기울었다. 1947년 12월 말 이승만 진영의 ‘한민족대표대회’와 김구 진영의 ‘국민의회’의 통합이 결렬된 이후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해 남북협상을 모색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2월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정치 지도자간의 협상을 제안하고, 북한이 3월 서신을 통해 정당·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 방식으로 역제안하면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단독 선거·단독 정부 수립에 관한 결정서 등을 채택하고 종료되었다.1)

여주에서 남한만의 단정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주도 세력은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우익의 본산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주지부를 비롯하여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 대동청년단 여주지부 등의 우익 청년단체들이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이승만 세력의 중추로서 남한 단독선거를 주도적으로 준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5·10 남한 총선거에서도 독자적으로 후보 235명을 출마시키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 무소속을 제외한 가장 많은 55명을 당선시킨 조직이다. 1946년 5월부터 독립국민회 여주지부장이자 대동청년단 단장이었던 원용한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회와 대동청년단 등 여타 우익 청년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남로당 등 좌파세력의 단정반대운동을 막아내며 여주에서 단선과 단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여주에서의 단정반대운동을 살펴보면, 주로 남로당 계열의 좌파세력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여주의 단정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미소공위를 통한 전한반도 차원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저지하면서 남한만의 단선과 단정 노선을 지향하였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에 대한 반대운동을 의미하므로 이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46년 5월 이승만의 정읍(井邑) 발언 이후 1947년 중반까지 여주의 남로당 세력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차 미소공위의 재개 및 이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시기이다. 둘째는 1947년 중반 미소공위 결렬 후 1948년 5·10선거를 거쳐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단선·단정 추진 세력인 우익의 주도하에서 남로당 세력이 야산대 등의 형태로 지하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비합법적인 형태로 단정반대운동이 펼쳐진 시기이다.

첫째 시기에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주주의민족전선 여주지부 등의 남로당 세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한 상태에서 상당한 조직적 규모를 가지고 단정을 추진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우익 청년단체들에 맞서 2차 미소공위 재개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중앙에서 권용활이나 박형병 등의 남로당 간부급 인사들이 여주에 와서 강연회 등을 통해 조직 복원 및 단정반대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또한 ‘공위 경축 민주임정수립촉진 인민대회’ 등 미소공위 진전을 위한 적극적 투쟁을 전개하였던 7월 27일의 인민대회는 다소 과장된 수치로 보이나 여주에서 3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당시 단정반대운동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째 시기에 접어들면서 남로당 세력이 야산대 등의 형태로 지하화하면서 단정반대운동은 비합법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당시 여주가 우익세력의 주도하에 들어간 상태에서 커다란 조직적 열세 속에서 단정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 여주의 비합법적인 단정반대운동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5·10선거 때 대신면의 ‘초현리(草峴里) 투표함 강탈사건’을 통해서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능서면에 사는 박모(朴某)라는 남로당원이 대신면 초현리 투표소에 들어가 고춧가루를 뿌리며 투표함을 송두리째 갖고 논을 건너 표촌리 쪽으로 달아나다가 당시 경비 중이던 두 경찰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었다. 이는 단정반대운동 차원에서 우익세력만의 5·10선거를 저지하고자 하였던 여주의 남로당원이 초현리 투표소에 들어가 투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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