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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반탁운동과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의 활동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2차 반탁운동은 제2차 미소공위의 재개 가능성이 높아가던 1947년부터 재연되었다. 이승만, 한민당, 김구 등의 임정계(臨政系)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폐기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했던 중도파·좌파 타도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면서 2차 반탁운동을 벌여나갔다. 반면 1947년에 접어들면서 1946년 11월 23일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은 당세 확장과 더불어 각종 대회나 집회 등의 합법적인 정치 투쟁을 통해서 제2차 미소공위 재개에 대비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정세와 좌·우익의 동향은 여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따르면 1947년은 좌·우 대립이 ‘마을 수준의 싸움’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즉 1945년은 중앙 수준에서, 1946년에는 도(道)와 군(郡) 수준에서 좌·우 대립이 진행되었다면 1947년에 이르러 미군정과 우익 진영이 중앙과 도·군의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자 이제 싸움은 최하층인 마을 수준에서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47년 반탁운동을 중심으로 한 좌·우 대립 등 여주의 정치적 상황은 1946년과는 또다르게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미소공위가 열렸던 1947년 5월에서 7월까지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좌익계열이 일시적으로 여주의 주도권을 회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윤선의 「여주소사(驪州小史)」에 의하면 당시 “중앙에서 파견된 좌익계열의 인사들이 여주에 내려와서 이전 좌익계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다니는 바람에 우익들은 주춤하여 고개를 숙이고 좌익들은 어깨가 으쓱하여 날뛰기 시작했다.”고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1) 또한 1947년 6월경 서울에서 내려온 좌익계 거물급인 권용활이 2,000여 명의 여주군민을 대상으로 반탁운동의 문제점과 제2차 미소공위의 재개 및 그 의의 등과 관련한 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자 이를 폭력적으로 저지하려는 ‘대한독립청년회(약칭 독청)’ 여주지단의 기동대원들과 일련의 충돌사태가 벌여졌다. 당시 우익청년단인 대한독립청년회와 매우 밀접한 연계하에 활동하였던 여주군의 경찰도 폭력적인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의 기동대원들을 제지하면서 강연회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도록 하였으나 충돌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은 왕성한 좌익계열의 활동에 의해서 간판마저 제대로 붙어 있을 날이 없었다고 하며, 사무실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2)

이 사건 직후인 7월에 남로당 경기도책인 박형병이 여주를 비롯하여 이천, 장호원, 감곡(甘谷) 등지를 다니며 남로당 선전선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의 대한독립청년회 본단(本團)에서 이천 일대의 조직점검과 독려차 내려온 서병지, 최순명 등이 기동대를 대동하고 순회하는 활동 중 좌익계열의 습격을 받았으며, 이에 서병지, 조항천, 최영환, 최순명 등이 강력히 대응하여 물리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남로당 경기도책인 박형병은 체포되어 이천경찰서에 인계되었다고 한다.3)

한편, 미소공위가 협의대상 문제로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미소공위 진전을 위한 적극적 투쟁의 차원에서 개최된 7월 27일의 ‘공위 경축 민주 임정 수립 촉진 인민대회’는 서울, 인천, 수원, 부산, 대전, 전주, 춘천, 대구 등의 도청소재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수원 4만 명, 김포 1만 7,000명, 인천 10만 명 등 대규모로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여주도 3만 명이 참가하였다.4) 그러나 이 수치는 어느 정도 과장되거나 인근지역인 이천이나 양평 등의 대회 참가자가 포함된 수치일 것이다.

1947년 8월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나자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여주지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다시 주도권을 잡고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 시기 여주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결정적인 국면을 가져온 것은 대한독립청년단 여주지단(驪州支團)의 결성이었다. 각 읍면과 리동에 이르기까지 말단조직이 계통적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단원들이 일정한 단복(團服)까지 착용하여 그 위풍과 기세가 당당하였던 여주지단의 결성은 이후 여주의 정치적 역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47년 4월 25일 여주지단의 결성은 여주군청 안의 광장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결성식에는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본부에서 서상천(徐相天) 단장이 참석, 격려 훈화하였고, 내빈 축사 후 오후 3시경 식을 마치고 시가행진에 들어감으로써 일반 주민들에게 대한독립청년회의 여주지단 결성을 알렸다.5)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이날 선출된 임원은 단장에 구종태, 부단장에 임의식과 이철상, 총무부장에 박수만, 조직부장 전종성 등으로 이들은 좌익에 대항하기 위해 지주 등을 중심으로 지역유지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의 직·간접적인 지원하에 결성되었다.

이 시기 우익계열을 대표하는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의 전체 단원수는 현재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50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여주지단 결성식에 3,000여 명의 청중이 집결하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청중이 동원되었겠지만 각 읍·면별로 여주지단의 조직이 결성되었고 또 이들 대부분의 단원들이 동원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500여 명의 단원이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핵심적 활동역량은 간부진과 기동대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동원가능한 조직역량은 1/5선인 약 100여 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청년조직들은 좌익과 우익을 막론하고 정치적 대립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찰력과 미군정의 군사력은 전국적으로 정치적 갈등을 충분하게 통제할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정치적 격동기라는 조건하에서 실질적 동원력을 가진 청년조직들의 역할은 정치적 역관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우익 청년단체들의 조직과 활동은 이미 1946년 9월 총파업에 대한 무차별적인 진압과 10월항쟁 때 폭력적인 테러로 절정에 이르면서 그 악명을 날리고 있었다.6)

1946년 9월 대한독립청년회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좌익 탄압이 전개되었고 읍·면별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해방 당시 좌익세력은 읍·면별로 그 활동력에 차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좌익의 역량이 강한 지역이 상대적으로 대한독립청년회의 주요 활동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평군과 인접한 금사면의 송현리와 외평리 등은 ‘여주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마을 수준의 싸움을 주도한 것은 바로 우익 청년단체였던 것이다. 우익의 공세에 맞서 좌익도 민애청 등 청년조직을 동원해 반격을 가했지만 좌익의 공세는 일시적이었으며, 매우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우익진영이었으며, 특히 경찰력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우익의 공세를 좌익이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윤선의 「여주소사(驪州小史)」에 의하면 중앙에서 대한독립청년회의 서상천(徐相天) 단장이 직접 이천을 거쳐 여주군에 내려와 여주읍내 조옥택의 집인 하리(下里)의 ‘취향각’에 본부를 두고 여주 대한독립청년회의 협력을 얻어 여주군내 좌익세력들을 사냥하듯 잡아다가 갖은 고문과 구타를 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상천 단장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잔악상은 “취향각 근처에는 노성고음(怒聲高音)·비명·애원의 소리가 진동하여 아비규환의 염라국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여주군청에서도 이름 있는 간부들이 취향각 신세를 졌다고 하며, 온후독실한 여주국민학교 정교장은 운동회 때 장식하는 만국기(萬國旗) 중에 소련기(蘇聯旗)를 달았다는 죄명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상리(上里)에 거주하는 지주들은 자제들이 좌익활동에 가담했던 전력에 전전긍긍하여 자진해서 땅문서를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에 기증하여 충성의 뜻을 표명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상점은 물론이고 고깃간(푸줏간)에도 ‘빨갱이에게 안팝니다.’라는 쪽지를 붙이게 하고, 빨갱이집 문패에는 ‘빨갱이집’이라는 주서(朱書)를 붙이게 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정도로 당시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원(驪州支團員)들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고, 여주는 대한독립청년회 일색으로 변하였다.7)

대한독립청년회 이외에 우익 청년단체로 여주에 지부를 설치한 조직은 대동청년단(약칭 대청)이 있었다. 단장인 원용한을 비롯하여 이철희, 이철상, 서은하, 임은규 등이 핵심 단원들이었다. 대동청년단 여주지부는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 다음으로 조직적 세력이 컸다. 1947년 10월 여주지부 단장이 된 원용한은 5·10선거에서 전국 대동청년단 후보로 나선 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주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6월 대동청년단 경기도 단장으로 피선되었을 정도로 다른 지역보다 여주의 조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의 부단장으로도 참여하였던 이철상 목사가 대동청년단 여주지부에도 참여하였는데, 그의 영향력하에 있던 여주지역 감리교 계통의 청년들도 조직원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8)

또한 정부 수립 직전에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여주단부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단장에는 한민당 계열인 오덕섭(吳德燮)이 맡았는데, 여주단부의 활동은 대한독립청년회이나 대동청년단에 비해서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9) 조선민족청년단은 다른 반공 청년단체들과 좀 달랐는데, 미군정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비정치·비군사·민족지상·국가지상’을 내세우면서 폭력적인 반공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당시 우익진영의 활동에 신변위협을 느낀 중도계열이나 좌파계열의 인사들이 다소 참여하면서, 중도파나 좌파 타도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고 조직 규모도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요컨대 1947년 우익계열의 반탁운동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주지부, 대한독립청년회 여주지단, 대동청년단 여주지부, 조선민족청년단 여주단부 등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차 미소공위가 실패한 후 여주의 반탁운동은 좌파세력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지지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넘어 주도권을 잡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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